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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진춘석"광야와 사막"

 

이육사의 시 <광야(曠野)>가 있다. “까마득한 날에/하늘이 처음 열리고/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중략-- 지금 눈 내리고/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다시 천고(千古)의 뒤에/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시간으로는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하고 공간으로는 원시의 광야에서 암흑의 현실공간을 지나 자유가 도래하는 미래의 공간인 광야를 애타게 그려내고 있다. 작품 ‘광야’는 신성한 공간에 구국(救國)의 초인을 열망하며 지조 있는 어조로 단호하고 강직한 군살이 없는 말끔하고 정갈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 작품에선 광야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 특성보다는 사회적 역사적 상징성을 추적하며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광야와 의미적인 면에서 유사하다고도 할 수 있는 사막(沙漠)이 있다. 사막은 황무지이다. 물 한 모금도 찾을 수 없는 바위와 모래, 자갈뿐이다. 물은 생명을 살린다. 따라서 물은 생명이다. 그런데 사막은 생명이 없는 곳이다. 아주 깊고 고요한 사막 한 가운데로 가더라도 아마 생명을 가진 나무는 전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정녕 생명이 없는 죽음의 공간이 사막이겠다. 누군가 사막의 한 가운데 서면 ‘죽음과 대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청마 유치환 시인의 시 <생명의 서>가 얼핏 떠오른다. 죽음은 생명이 없음이니 생명수도 물론 없음이리라. 그런 극한(極限) 공간에서 한 줄기 희망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도시라는 광야에도 사막은 분명 있다. 일체의 생명이 거부된 곳. 생명은 되살리는 에너지이며 상승하는 원동력이고 상생과 조화로움이요, 상호간 의사소통이다. 반면에 생명이 거부하는 것은 반생명이다. 곧 물질이다. 물질은 생명의 파장이 없다. 무지막지한 에너지이며 공중에서 낙하하는 하강적 본능을 가지고 있다. 분열과 이기적 독단적 판단만이 판을 친다. 피 한 방울 나지 않은 채 파멸해 잔인하게 매장된다. 언필칭 명예가 실추돼 복구가 어렵게 된다. 생명수보다는 독극물을 선호하는 도시인들의 사막적 취향. 악취미가 아닐 수 없다. 독극물에 중독된 현대인들이 만들어 내는 음악은 조화로운 오케스트라가 아니라 광시곡(狂詩曲)이다. 미치지 않고서야 생명수가 하늘에서 내리는데 많이 내리면 많이 내린다고 투덜대고, 적게 내리면 간(肝)에 기별도 가지 않는다고 푸념하는 현대인들. 하늘이 준 생명수를 고맙게 받아들이고 감사한 마음으로 찬양하기 보다는 삿대질하며 원성이 자자하다. 이 어찌 아름다운 정신이라 할 수 있을까?

최근에 뉴스를 보면 미치광이들이 독극물을 뒤집어쓰고 있는 형국이다. 착잡하지 않을 수 없다. 길거리에서는 묻지마 칼부림 횡포, 강제겁탈, 귀한 목숨을 컴퓨터 자판기로 자모음 지우기를 하듯 여반장(如反掌)처럼 해대니, 우리의 이런 현실이 어찌 생명이 숨 쉴 수 있는 공간이란 말인가? 욕망의 덩어리들이 생명수를 만나 정화돼야 하는데 오리혀 독극물을 뒤집어 쓰고 있으니, 생명이 거부된 도시의 사막에서 욕망의 화신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다. 무서운 현실이다. 아니 분노가 치미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그냥 바라볼 밖에 없다. 그래도 나는 종말이 오더라도 사과나무를 심으려 한다.

▲1992년 시문학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평택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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