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7월 30일은 우리의 독도 영유권이 재확인된 획기적인 날이다. 우리 외교 관계자들은 그해 7월 25일 미국지명위원회(BGN)가 독도의 영유권 표기를 ‘한국’과 ‘공해’에서 ‘주권 미지정’으로 변경했음을 확인했다. 당시 주미 대사관에서는 미국 실무자들과 접촉을 시도했지만 “이미 결정 난 일이다. 미안하다”는 말만 들어야 했다. 우리 외교 당국자는 외교적 결례를 무릅쓰고 독도 문제의 심각성을 부시 대통령에게 긴급히 설명 원상회복되었다.
이는 미국이 미흡하나마 독도 영유권 문제에 있어 간접적으로 한국의 손을 들어준 셈이다.
하지만 우리 국민들이 명심해야 할 게 있다. 미국지명위원회는 당시 분쟁이 있는 섬들의 영유권을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국가로 기재했다. 일본과 분쟁관계에 있는 섬들에 대해 북방 4개 섬은 러시아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러시아로,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 열도)는 일본이 점유하고 있다는 이유로 일본으로 분류했다. 그러나 유독 독도에 대해서만 한국이 명백히 실효지배하고 있는데도 ‘주권 미지정’으로 변경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일본 외교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은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고도 종전을 위한 강화조약에서 미국으로부터 유독 많은 배려를 받았다. 1946년 1월 연합국 최고사령부 맥아더 사령관은 포고령 제677호와 관할지도를 통해 독도를 포함한 한국을 일본으로부터 분리시켰다. 그리고 6개월 뒤 포고령 제1033호를 발하여 일본 어선들의 독도 12마일 이내 접근을 금지했다. 독도는 완전히 한국 땅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정치고문 시볼드(Sebald) 등을 동원하여 온갖 로비를 자행하였다. 그 결과, 강화조약 제5차 초안까지 한국령이던 독도가 제6차 초안에서는 일본령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영국, 호주 등의 반발로 일본령으로도 기재되지도 못했다. 결국 1951년 9월 미국 등 연합국 48개국과 일본 간에 샌프란시스코 대일(對日)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이것을 근거로 일본은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긴다. 미국의 원죄(原罪)로 한·일 독도 분쟁이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 2008년 미국지명위원회의 독도 분류 변경과 2차 대전 후 대일 강화조약 초안 마련 때 독도 영유권 변경 사례가 유사하지 않은가! 일본은 청일전쟁에 이어 러일전쟁 과정에서 전략적으로 활용가치가 높은 독도를 편입시켰다. 그리고 나라마저 병합해 버렸다. 현재 일본은 청나라를 승계한 중국과 댜오위다오(센카쿠 열도) 영유권 분쟁을 벌이며 미국에 편승하는 가운데 무력까지 불사하고 있다. 그 다음은 어디겠는가? 당연히 독도다.
전후 독일은 과거의 역사를 되새기며 끝없이 사죄하는 반면, 일본은 역사까지 왜곡하여 과거의 전범적 행위를 당연시한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독도 도발을 위한 시나리오를 발전시키고 있다. 과거 우리 정부의 조용한 외교 기조는 일본의 시나리오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였다고도 볼 수 있다. 국제사법재판소(ICJ)의 판례를 살펴보면 타국의 영유권 주장을 묵인하거나 조용한 외교를 펼친 국가에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끊임없이 영유권을 주장하며 선도적으로 대응한 국가의 영유권을 인정해 왔다. 그렇다고 일본과의 분쟁을 일부러 확산시킨다면 우리에게도 유리할 것이 없다.
우리는 미국 관리들의 일본 편향적 태도를 합리적 관점에서 일거에 바꿔버린 부시 전 대통령의 조치를 중시해야 한다. 당시 일본은 미국에 대해 아무런 항의를 하지 않았다. 이는 외교적으로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묵인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할 것이다. 일본에 질질 끌려 다녔던 과거의 관행에서 탈피한 우리의 외교적 승리였다. 퇴임한 부시 대통령을 떠들썩하지 않게 조용히 초청하여 우리의 고마움을 은연중 표시한다면 다시 한 번 우리의 외교적 승리를 확고하게 구축할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새 정부의 부시 전 대통령 초청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과 러시아가 서명하지 않은 가운데 샌프란시스코 대일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사실을 중시하여 중국, 러시아와의 사안별 공조외교도 필요하다. 모두 일본과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외교관계에 있어서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