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타고난 변덕을 어쩌지 못하고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눈을 날리기는 해도 바람이 순해지고 옷차림이 가벼워진 걸 보면서 봄을 실감한다. 밤늦도록 봄비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목마른 대지는 젖 빠는 아이처럼 단비에 흠뻑 젖어 온갖 풀과 나무에 새싹이 돋겠거니 하고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산에 눈이 하얗게 쌓였다. 안쓰러워 집 주위를 돌아보니 겨우 찻숟가락 만하게 자란 질경이 싹이 파란 얼굴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어온다.
오랜만에 장날이면 나오는 옛날 찐빵과 꽈배기가 생각나 부지런히 뛰어가면 지금 막 끝내려고 하는 판이라며 주섬주섬 덤으로 얹어 다 팔았다고 해서 하는 수 없이 돌아서려는데 바로 앞 손님이 아는 얼굴이라 맛이라도 보라며 몇 개 건네주는 인심이 있어 그 자리에서 한 잎 베어 물고 오물거리며 돌아오는 발걸음은 또 얼마나 가볍던지.
우리는 지금도 연탄을 때는데 바쁠 때는 정신없이 일을 하다 연탄 갈 시간을 놓치기 일쑤다. 꼼짝 없이 온 집안에 번개탄 연기를 피워야 하겠구나 하고 화덕을 들여다보면 몇 구멍이 살아서 담뱃불처럼 빨갛게 보이는 불은 나에게 있어서 바다에서 등대를 만난 것 그 이상의 환희로 나를 채운다.
고향에 사는 친구들은 오가며 가끔 만나지만 멀리 사는 친구들 중에는 어린 시절에 떠나 수십 년을 헤어져 서로 잊고 살다 나이 들어 만나는 친구가 있다. 그 중에는 어린 시절에 우리는 상상도 못했던 고생을 하다가 성공한 후 지나온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 눈물을 닦아주기도 하고 성공담을 들으며 내 일처럼 기뻐하면서 뒤도 돌아보고 싶지 않을 만큼 고생스러웠던 고향이 그리워 근처를 지나며 일행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갔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친구들을 다시 만나 허물없이 얘기를 나눌 수 있음이 성공보다 더 큰 행복이라고 말하는 친구가 있음은 얼마나 큰 행복인지 모른다.
결혼 하고 근 삼십년을 살고 있지만 아직도 나는 소위 골방에 산다. 가끔 분가해 사는 친구들 집에 가면 넓은 방을 쓰는 친구들이 부럽기도 했고 집수리를 하면서 이 기회에 방을 바꾸라는 말도 듣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어머니께 안방을 내달라는 말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연탄보일러라 겨울이면 찜질방 같은 방에 거의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시는 친구 분들과 하루를 소일하시는 낙을 그만두시라는 말은 폭력처럼 내게도 너무 무거워서 엄두도 못 내고 그 분들 웃음소리와 고맙다는 인사로 충분한 보상이 된다.
지난 한식에 비가 내려 형제들이 모이지 못했다. 도시에 나가 살아도 잊지 않고 때가 되면 조카들을 데리고 성묘를 하고 얼굴 보고 밥 한 끼 먹고 헤어지는 마음 씀씀이가 고마운 형제들이 올해는 그도 못 하겠구나 허전해 하는데 이번 주말에 꼭 가기로 했단다. 게다가 아르바이트하는 대학 5학년 아들도 온다고 했더니 장손이 역시 다르다고 기특해하며 칭찬이 줄을 잇는다.
이른 새벽 머리맡에 둔 휴대전화가 울린다. 장거리 출장을 자주 가는 친구가 보내는 아침 인사에 내 생각이 나서 보냈다는 사진 속 총총히 핀 꽃마리가 두고두고 아른 거리는 봄이, 또 하나의 행복으로 가슴에 담긴다.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 작가 신인상 수상 ▲가평 문학상 수상 ▲가평문인협회 이사 ▲플로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