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 지난 14일 발표한 수사결과에 따르면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재임 기간 동안 각종 공직선거와 관련해 12건, 국내정치와 관련해 10건의 개입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이에 따라 심리전단 직원 등이 동원돼 인터넷 사이트에 불법 게시 글 1천977건을 올렸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는 지난 대선 관련 글 72건이 포함돼 있다. 심리전단은 이른바 ‘국정원녀’ 사건이 발생한 직후에도 버젓이 이 사건을 정치적 음모로 모는 글을 다수 올리는 공작을 벌인 것으로 드러났다. 한편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은 경찰 분석팀이 증거물을 포착했다는 보고를 받고도 이를 왜곡 발표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찰은 이들을 불구속 기소했다.
검찰이 원 전 원장의 선거와 정치 개입 전모를 밝혀냈다고 믿을 국민은 없다. 국정원장이 내렸다는 ‘지시말씀’은 일국의 정보 총책임자의 언행이라고 차마 믿기지 않는, 터무니없는 논리와 언사로 점철돼 있다. 이런 수준의 지시를 내렸는데 불법 게시 글이 1천977건밖에 되지 않을 리 없다. 빙산의 일각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투입된 직원도 공식 직원의 몇 배에 이른다고 보아야 한다. 또한 김 전 청장이 단독으로 대선 승부의 분수령이 되는 시점에서 왜곡 발표를 강행했으리라고 보는 것도 상식에 어긋난다. ‘국정원녀’ 사건 이후 흐름을 보면 김 전 청장은 여당 수뇌부와 긴밀하게 협의했거나 거래한 정황이 역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찰은 더 이상 파헤치지 않았다.
국정원장이 선거에 개입한 증거는 단 한 건만 드러나도 국기를 흔드는 중대한 범죄다. 그런데 대선, 총선, 지방선거를 가리지 않고 계선을 통해 조직적으로 정치 개입을 해왔다면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 정상적인 민주주의 법치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반드시 전모를 완전히 드러내 관련자를 엄중하게 처벌하고 가야 한다. 이런 불법과 불의를 어물쩍 넘어가려는 시도 또한 그 자체로 헌정 질서를 허무는 행위다. 빗나간 충성심마저 감싸고돌면서 원칙과 정도를 외치는 건 국민에 대한 우롱이다.
향후 재판과는 별개로, 국회는 이미 합의한 대로 국정조사에 속히 착수해 주기 바란다. 국가 핵심 기관인 국정원이 본연의 역할로 돌아갈 수 있도록 대수술 하는 일이 시급하다. 여당은 “선거법 적용 재검토” 운운하면서 국민의 법감정과 동떨어진 ‘물타기’ 주장이나 늘어놓을 한가한 때가 아니다. 아울러 청와대도 직접 나서서 국정원 개혁에 대한 명확한 청사진을 밝혀야 할 것이다. 현 정부의 출범과 관련된 사안이라고 해서 미적거릴수록 국민들의 불신이 커질 수밖에 없다. 고통스럽더라도 환부는 빨리 도려낼수록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