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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아아 어찌 잊으랴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후략-’ 이 노래를 아는 젊은이들이 얼마나 될까?

아직도 끝나지 않았으나 잊혀가는 전쟁, 6·25로 수백만명이 죽었고 1천만 이상의 이산가족이 생겼다. 남·북한은 물론 중국동포까지 무사한 가정이 없었다. 우리가족도 이 전쟁에서 막내삼촌을 잃었다.

1950년, 중학교 3학년이던 삼촌은 학도병으로 참전하셨다. 평소와 다름없이 책가방을 들고 집을 나선 후 그 길로 영영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다. 그해 여름, 먼 메아리처럼 쿵… 쿵 하는 소리와, 보퉁이를 이고 진 사람들이 신작로를 따라 줄지어 가고 있었다. 우리들의 놀이터였던 당산나무 아래에도 낯선 사람들이 빼곡 차, 누워 있거나 밥을 지어 먹던, 바랜 흑백사진 같은 유년의 토막기억들이 남아있다.

삼촌은 입대 후 한 번의 연락도 없었다. 막내를 전쟁터에 보낸 할머니의 눈물은 마를 날이 없었다. 장맛비가 내리고 두꺼비가 엉금엉금 마당으로 기어 나오던 날, ‘홍두야’ 삼촌을 부르며 통곡하시던 모습이 선하다. 문풍지가 파르르 우는 한겨울, 화롯불 앞에서는 ‘이놈이 어디서 떨고 있는지’ 색다른 음식은 넘기지를 못하시고 ‘어디서 굶고 있지나 않는지’ 하며, 앞앞이 눈물을 뿌리고 다니셨다.

삼촌이 실종되었다는 통지서를 받았다. 최후의 보루였던 낙동강 전선, 학도병들의 몸으로 막았던, 안강(安康)전투에서 행방불명되었다 했다. 우리가족은 그나마 전사통지가 아니므로 한 가닥 희망을 놓지 않았다. 삼촌이 ‘오매’ 하면서 삽짝을 밀고 들어올 것 같아 밤에도 걸지 못하였다. 밀고 밀리던 전투가 멈추고 휴전이 되었으나 삼촌은 내내 돌아오지 않았다. 언제부터인지 보훈처에서 연금이 나왔지만 조부모님은 오랫동안 막내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셨다.

세월이 훌쩍 지나 1992년, 사업차 중국에 머물면서 만주에 살고 있는 외갓집 식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안동(安東) 유림이었던 외조부님께서 경술국치 직후 독립운동을 위하여 솔거하여 만주로 이주하셨다. 놀랍게도, 작은외삼촌이 6·25동란 때 중공군으로 참전하여 의정부까지 내려 오셨다한다.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고, 마을에서 징집된 사람들 대부분 살아 돌아오지 못하였다 했다. 6·25가 일어나자 중국정부는 항미원조(抗美援朝)를 외치며 우리 동포들을 대대적으로 징집하였다.

인해전술로 내려온 중공군 중에는 수많은 우리 동포 젊은이들이 섞여, 변변한 무기도 없이 동족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몰렸던 것이다. 나의 친삼촌과 외삼촌이 같은 전쟁에서 서로 총을 겨누었다. 이런 비극이 비단 우리집뿐만은 아닐 것이다.

소용돌이쳤던 역사 속에서 같은 시대를 살았던 우리민족 모두가 피해자였다. 이데올로기가 자신이나 가족의 생명보다 중요할 수는 없다.

우리가 겪은 그 유래 없는 동족상잔이 아직도 끝나지 않고 위협이 계속되고 있는데도, 왜곡되고 잊혀 간다는 사실이 개탄스럽다.

비극의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결코 이 전쟁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월간〔한국수필) 등단 ▲한국수필가협회 회원 ▲한국문인협회가평지부장 역임 ▲저서: 수필집 ‘남쪽포구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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