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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정치]금융실명제 만들던 20년 전 김진표에게

 

진표야, 기억나니? 정확히 20년 전 오늘 아침, 대한민국이 발칵 뒤집혔던 사실을. 당시 너는 김영삼 대통령이 TV를 통해 금융실명제를 도입하는 긴급명령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보면서, “드디어 해냈구나” 안도감을 느꼈었지.

나는 지금도 대한민국 금융거래 질서를 바로잡고 투명성을 높여서 우리경제의 패러다임을 바꾼 그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오른단다. 그때 너는 재무부 국장으로 승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40대의 팔팔한 나이로 조세연구원 파견 근무를 나갔다가, 그해 4월에 갑자기 세제총괄심의관으로 발령받아 극비리에 금융실명제 도입 작업을 맡았었지.

금융실명제는 보안이 생명이라서 당시 이경식 경제부총리, 홍재형 재무부 장관, 김용진 세제실장과 ‘젊은 진표’, 딱 네 사람만 그 내용을 알고 있었지. 보안이 누설되면 책임지겠다고 사표를 쓰면서 “30대 사무관 시절의 좌절을 답습해선 안 된다”며 각오를 다졌지.

너와 금융실명제의 인연은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더군. 1982년 전두환 대통령의 5공화국은 장영자 이철희 어음사기 사건으로 정권의 부도덕성이 드러나면서 온 나라가 들끓었지. 이처럼 발등에 불이 떨어진 5공화국은 민심을 달래기 위해 금융실명제를 검토하게 되었지.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이 팀을 구성하면서, 소득세를 가장 잘 아는 실무자로 너를 뽑았다더군. 그 당시 광화문 종합청사 옆 별관 장관실이 비밀팀의 작업장이었지. 낮에 부처 업무를 보고, 퇴근 후 금융실명제 기초작업을 하면서 밤을 새기 일쑤였지. 그래도 너는 나라의 금융 질서를 바로잡는다는 사명감과 열정으로 피곤한 줄 몰랐던 것 같아. 하지만 소위 7·3 선언으로 금융실명제 원칙을 밝히고 법까지 만들고서도 끝내 기득권층의 반발에 가로막혀 금융실명제가 유야무야 되고 말았지.

40대의 진표야, 금융실명제는 말 그대로 경제 거래의 패러다임 혁명이잖아. 그렇기 때문에 극비리에 준비 작업이 이뤄지고 전광석화처럼 전격적으로 이뤄져야 성공할 수 있다는 교훈을 30대 시절의 좌절로부터 배웠지. 이를 위해서는 재무부 동료는 물론 아내까지 속여야만 했지. 일단 실무작업을 도와줄 연구원들을 점찍은 다음, 장기 해외출장 명령을 내리는 것이 첫 작업이었어. 이들은 명령서를 받고 과천 청사에서 공항으로 가는 도중에 비밀리에 마련된 아파트로 안내되어 사실상 감금당했지.

상황이 이쯤 되니 아내에게도 말 한마디 못하고 괴로웠지. 일주일에 한번 집에 들어가서 김치며 반찬을 만들어달라고 해서 들고 나가면서 “통일 이후 전반적 국정 운영에 대한 비밀작업을 추진한다”고 변명을 둘러댄 걸 생각하면 지금도 헛웃음이 나와.

40대의 진표야, 아내까지 속여 가며 금융실명제 성공을 위해 매달린 이유를 잊진 않았겠지? 일찍부터 실명 거래가 정착되었던 서양과 달리 인장 문화가 발달한 우리는 차명거래가 당연시되었거든. 더군다나 5·16 군사 정부가 ‘예금, 적금 등의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을 만들어 모든 금융자산의 가명, 무기명 거래를 보장해주었거든.

산업화 시기 초반에는 이 제도가 국내 저축을 늘리는 유인책으로 작용하여 경제개발에 필요한 재원조달에 기여했으나, 점차 문제점이 드러나게 되었지. 검은 돈 세탁이 가능하다는 것은 그만큼 부정부패를 키울 공간을 합법적으로 만들어 준 거잖아. 대형 금융사기, 불법 정치자금 사건이 터지면서 슬금슬금 커져버린 지하경제가 정상적인 나라 경제를 좀먹고 있었잖아.

그걸 개혁하고 바로잡기 위해 너의 열정과 노력을 바친 거잖아. 금융실명제가 안착하면서 투명한 금융거래로 인해 불법적 방법으로 재산을 축적하기 어렵게 되고, 가명 거래를 통해 상속·증여세를 회피하거나 금융시장을 교란시키는 것을 막아 조세부담의 형평성을 제고시켰잖아. 게다가 음성적인 지하 정치자금의 흐름을 막아 깨끗한 정치 풍토를 만드는 데도 한몫했잖아.

금융실명제 도입으로 상당한 경제적 손실을 입었던 장인어른한테 미리 귀띔해주지 않았다고 원성 산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인간적으로 송구스럽긴 해. 하지만 공직자라면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고, 올바른 길로 가야 하잖아. 20년 전의 진표야, 나는 오늘도 그때의 너를 거울삼아 더욱 개혁적인 삶을 살려고 한단다. 초심을 잃지 않는 뚜벅걸음이 세상을 바꾼다고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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