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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양초 한 자루가…

 

찜통 폭염이다. 연일 전력난이 이어지는 가운데 정부는 오늘도 전력수요가 사상 최대치를 경신하며 최악의 전력수급 상황을 보일 거라 예상하고 ‘순환단전’ 또는 ‘블랙아웃’ 등 최악의 사태를 언급했다. 더하여 긴급 절전 운운하며 폭염주의보 속에서 ‘닥절’(닥치고 절전)을 강요하고 있다. 갑자기 들이닥칠 최대의 재앙이 될 대정전인 블랙아웃이 남의 일이 아니란 생각에 이르자 나는 지난해 태풍이 들이닥쳤을 때 정전을 대비하여 준비해두었던 양초, 갑자기 벌어진 그 깜깜한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만들어 주었던 양초 한 자루가 생각났다.

사람들은 늘 넘치게 풍부할 때 감사할 줄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언제든지 스위치만 올리면 켜지는 전등, 아침에 눈만 뜨면 떠오르는 태양이 비추어주는 그 빛, 그 온기의 고마움을 평소에는 느끼지 못하고 요즘처럼 대정전을 떠들어대며 최악의 상황이 전개되어야 위기의식을 느끼고 그 작은 양초 한 자루를 떠올리니 말이다. 서랍장 구석에서 찾아낸 양초를 촛대에 꽂아 불을 붙여 보았다. 깜빡 깜빡이며 제 몸을 태워 빛을 만들어내고 있는 양초 한 자루, 벽에 제 몸 그림자를 이글거리며 깜깜한 방을 서서히 밝혀 나가기 시작했다. ‘저렇게 작은 몸에서 어찌 저런 큰 힘이 나올까?’ 그 불빛 바라보노라니 오래된 내 기억 속 또 다른 양초 한 자루가 떠올랐다.

여고시절 단짝 친구였던 영희는 점심시간만 되면 집을 다녀와야 했다. 시골에 계시던 홀어머니께서 풍을 맞아 수족을 못 쓰게 되어 팔순의 외할머니와 함께 학교 옆에 집을 얻어 모셔 두었기 때문이다. 외할머니는 연로해서 엄마 시중을 다 들 수가 없어 점심시간마다 친구가 집으로 가서 점심시중과 대소변을 받아내야 했던 것이다. 단짝 친구였던 나는 그 친구와 함께 어머니 시중을 같이 들곤 했는데 집안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양초에 불을 붙이는 일을 했고, 할 줄 아는 말이라곤 욕 몇 마디밖에 못하시는 수족을 못 쓰는 어머니를 일으켜 대소변을 해결하고 밥을 챙겨 드렸다. 희한하게도 양초에 불을 붙여두면 그 역겹던 대소변 냄새가 서서히 사라지는 것 같았다. 양초는 그렇게 자기 몸을 태워 역겨운 냄새를 없애주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작은 몸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오지? 너 말이야, 또 그 작은 양초 한 자루가 말이야.’ 돌아오는 길에 친구에게 얘기하곤 했었다.

비지땀을 흘리면서도 전력난에 동참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에어컨을 켜지 않고 일을 하고 있는 직장의 근로자들이나 가정가정마다 전기콘센트 하나하나를 점검하고 뽑아두려고 애쓰는 가정주부들까지, 그들은 각자 자신의 소임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마치 제 몸 불태워 자기소임을 다하고 있는 한 자루 양초처럼, 언뜻 보기에는 작고 하잘 것 없어 보이지만 그들의 그 노력이 대정전이라는 엄청난 재앙을 막을 수 있을 만큼 큰 힘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그보다 더 큰 힘이 없는 것이다.

폭염주의보가 해제되고 대정전이란 단어가 귀에서 멀어지는 순간 나는 다시 양초의 쓰임새, 개개인의 절약정신의 위대함 따위를 한동안 잊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 깜깜해지는 순간 비로소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될 양초 한 자루, 그때마다 떠오르는 친구의 모습은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나의 소중한 보석으로 남아있다. 문득문득 떠올릴 때마다 가슴 따뜻하게 해주는, 사람의 도리에 대해 다시 한 번 되새김질하게 해주는, 땀이 범벅되도록 어린 몸으로 자기 역할을 말없이 해내던 기억 속 그 친구의 모습이야말로 사회라는 넓은 사람들의 바다 속에서 소박하게 자기소임을 다 할 줄 아는 어둠을 밝혀주는 양초 한 자루의 모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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