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월이 시작되자마자 기온이 갑자기 떨어져 새벽이면 가을을 건너뛰고 겨울이 온 듯 손이 시리고 이슬이 무거워 쳐진 나뭇잎을 보면서 혹시 서리가 내리지는 않았을까 살펴보게 된다.
보통 구월은 아침저녁은 선선하고 낮에는 볕이 따가워 여름과 가을이 각자의 길을 가며 마주치는 길목이라고 여기고 살았는데 이번에는 달력 한 장을 넘기면서 숨어있던 가을이 위세를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가을이 오기 전에 옷장 정리를 하고 이불빨래를 하는 등 계절의 변화에 대응을 하는 한편 조상님 산소에 벌초를 하는 것으로 가을 채비를 한다.
여름의 마지막 휴일에 늑장을 부릴 요량으로 잠자리에서 뒤척이는데 휴대전화가 훼방을 놓기 시작한다. 빨리 문 좀 열라는 카톡을 확인하고 하는 수 없이 옷을 챙겨 입고 나가보니 한 번씩 만나게 되면 웬만한 사람은 다 언니라고 부르며 넉살 좋게 사는 사람이 갑자기 산에 갈 일이 생겼으니 운동화를 빌려 달라며 밀고 들어온다.
하는 수 없이 신발장에서 운동화를 꺼내주니 재빠르게 신고 달려 나가고 여름에 편하게 신고 다니는 젤리슈즈가 놓여있고 그나마 한 짝은 엎어져 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워낙 얼결에 당한 일이라 안 된다 소리도 못하고 속으로는 안 맞았으면 하고 바랐지만 그도 통하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후 집 앞에서 누가 갑자기 뒤에서 끌어안기에 돌아보니 바로 운동화를 빌려간 사람이었다. 예의 그 넉살좋은 얼굴로 운동화를 잘 신고 빨아서 말렸는데 가지고 오는 길에 친한 사람이 학교에서 아이들과 학부모가 함께 어딜 가는데 야외 활동인줄 모르게 구두를 신고 나와 어쩔 줄 모르고 하도 난처해하기에 인심 좋게 빌려 줬다고 하는 말에 나는 그냥 아무 생각도 없이 말려들었다.
구월 들어 쌀쌀해진 날씨에 아침 운동을 하는 사람도 늘고 가까운 산행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우리 지역의 특산물인 운악산 포도가 선을 보이기 시작했다. 길을 가다 누가 손짓을 해 가보니 친구가 가판대에서 건네는 포도를 고맙게 받아먹으며 농사 작황과 빠른 추석에 판매가 어려울 거라는 말을 주고받으며 친구들 모임에서 해마다 하는 가을 등산이야기가 나왔다.
순간 머리를 스치고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의 수면위로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운동화를 수소문하니 이번에도 기기묘묘한 대답을 들려준다. 그 아이 엄마에게 물어보니 친정 동생이 뒷산에 버섯이 있나 보려고 신고 나갔다고 금방 올 거니까 기다린 김에 조금만 더 기다리라는….
가을날 이른 아침에 넉살좋은 여인의 발길을 따라 나선 내 가엾은 운동화는 낯모르는 학부모를 따라 현장학습에 동행을 하더니 이번에는 친정 동생 덕에 버섯이 올라오는 산에까지 간다니 집에 갇혀 사는 주인도 못가는 가을 나들이를 일찌감치도 다니고 있다.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 작가 신인상 수상 ▲가평 문학상 수상 ▲가평문인협회 이사 ▲플로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