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 기온은 떨어지고 가을이 짙어간다. 하늘은 누가 닦은 것처럼 티 없이 맑고 푸르다. 날씨가 쌀쌀해지면서 덩굴만 무성하던 고구마도 토실토실 살이 오르고 고들빼기 몇 포기 뜯어 별 양념 없이 버무리면 맛도 철을 따라 온다. 부르지 않아도 가을이 오고 때를 찾아 물빛도 깊어지고 산열매도 여문다. 언제나 사람만 때를 놓치고 허둥댄다.
박스와 폐지를 주우며 사시는 할머니 한 분이 볕 좋을 때 썰어 말리라며 호박 몇 개를 들고 오셨다. 바쁜 시간 아닌지 살피시며 얼굴 잊어버릴 지경이라시며 일부러 핑계를 만들어 오신 듯해 잠시 마주 앉았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분들이 하나 둘 병치레 끝에 요양원으로 옮기기도 하고 하늘나라로 떠나는 와중에 가을이 오니 허전한 속마음을 슬쩍 비추신다.
외아들에 딸 셋을 두셨는데 요즘은 딸이 더 잘한다는 말도 듣기는 하지만 딸이고 아들이고 모두 살가운 성격이 아니라 처음부터 기대하지도 않고 저희들 잘 사는 것만 바라고 살아오셨다. 그러다 차츰 힘이 부치면서 곁을 지키는 자식이 하나라도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떠오르는 것까지 막을 도리가 없다고 하신다.
혼자 살면 젊어서야 편하고 좋지만 막상 힘 떨어지니 끼니 때 돌아오는 게 제일 귀찮다는 말끝을 흐리며 몇 번을 우리고난 빈 종이컵을 놓지 못하고 계시다 갑자기 바쁜 사람 일 밑지면 손해라고 하시며 언제 그랬냐 싶을 정도로 씩씩하게 전신주에 기대 졸고 있던 리어카를 끌고 햇빛을 향해 떠나가신다.
할머니는 가끔씩 자식들과 사는 사람들을 부러우신 듯하셔도 어느새 혼자 사는 게 속 편하고 좋다는 말씀을 일부러 힘주어 하신다. 그 힘으로 꿋꿋이 사시다가 무슨 종교 단체나 봉사단체에서 주는 음식이나 밑반찬을 자랑삼아 들고 오시기도 하고, 지자체에서 지급하는 연료비나 의료지원비를 자랑삼아 얘기로 함께 계시던 할머니들의 부아를 슬슬 긁어 놓기도 하신다.
기초생활 수급자에게 주어지는 최소한의 지원이 마냥 부러운 할머니들은 그 자리에서는 별 기색이 없으시다가 막상 집에 가셔서 분풀이를 하신다. 누구는 나라에서 돈도 주고 김치도 주고 틀니도 공짜로 해 준다며 자식보다 낫다고 하시는 통에 모시고 사는 자식들이 이런 저런 말로 이해를 시키려 해도 막무가내라 나중에는 어디 골방이라도 얻어 따로 분가시키겠다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하는 일도 간혹 생긴다.
얼마 전에는 대통령의 복지 공약을 놓고 온 나라가 시끄러웠다. 그러나 평소에는 다른 사람에게 주어지는 혜택을 그렇게 부러워하시던 분들도 막상 나라에 빚도 많다는데 무슨 수로 다달이 이십 만원씩이나 주느냐고 하신다. 그분들이 그렇게까지 너그러워지신 것도 다 이유가 있다. 금이야 옥이야 기른 손자들이 우리 때문에 진 빚에 치어 고생할까봐 염려하신다는 얘기다.
복지, 복지 하다가 나중에 괜한 애들만 볶지….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 작가 신인상 수상 ▲가평 문학상 수상 ▲가평문인협회 이사 ▲플로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