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초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가 당사에서 단식농성을 벌이는 장면이 TV뉴스 화면에 잡혔을 때였다. 필자는 단식농성 중이라는 최 대표가 연일 거물급(?) 방문객들을 맞느라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아연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에이, 저게 무슨 단식이야…’
문득, 작가 황석영의 얼굴이 떠올랐다. 연관성을 발견하기 힘든 두 사람의 얼굴이 필자의 마음속에서 동시에 오버랩 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몇년전 기나긴 수감생활 끝에 석방된 황석영은 예의 녹슬지 않은 필력으로 장편소설 ‘오래된 정원’을 발표했다. 소설에는 그의 이전 작품들이 그렇듯 혼미한 조국의 현실을 괴로워하는 지식인의 고뇌가 담겨있다.
그리고 ‘오래된 정원(하권)’의 내용 가운데 교도소에 수감중인 정치범들의 단식투쟁에 얽힌 묘사가 나온다. 옥중 단식에 대한 그의 자세한 묘사는 실로 압권이다. 단식의 기간에 따라 준비해야 할 것은 무엇이며, 또 단식기간에 따른 신체의 생물학적 변화는 어떻게 진행되는지, 그에 대한 대책은 무엇이며, 그래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극한의 고통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고스란히 살아 움직이는 세세한 묘사로 풀어내고 있다.
필자는 그 옥중 단식 부분에서 작가 황석영의 진면목을 재삼 확인했다. 그건 황석영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표현들이라고 생각했다. 그 지난한 배고픔의 고통을 실제로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어찌 표현을 할 수 있겠는가.
‘단식’을 매개로 작가 황석영과 정치인 최병렬의 얼굴이 동시에 떠오르긴 했지만 사실 소설속 양심수들의 옥중 단식과 최 대표의 단식 간에는 아무런 연계성이나 유사성이 없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소설과 현실의 차이 이상의 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일들이 나란히 존재하고 있다. 최 대표가 당사에서 손님맞이(?)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을 무렵, 이땅의 다른 곳에서는 의미있는 단식농성들이 처절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생명의 보고 서해안의 갯벌을 지키기 위해 60여일간 3보1배로 330km를 고행하고도 모자라 또 다시 부안주민들의 생명에 대한 갈구를 외면하지 못해 무려 20여일간이나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는 문규현 신부의 단식농성과 천성산의 뭇생명들을 살리기 위해 무려 45일간이나 단식농성을 벌였던 지율 스님, 그 외 숱한 노동자들의 생존권 사수를 위한 치열한 단식농성 등은 언론의 철저한 외면 속에서도 끝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거듭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주었다.
반면, 최 대표는 오로지 자신(일부 썩은 정치인들 포함)을 살리기 위해 민생과 국정을 죽이는 단식을 감행했을 뿐이다. 최 대표의 단식에는 애초부터 결여된 것이 있었다. 의도의 순수성과 의미의 진정성이 그것이다. 대체로 사회적 약자 혹은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은 권력에 대한 최후의 저항수단으로써 단식을 감행한다.
반면 최 대표의 단식은 이미 많은 것을 가진 자가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 부린 오기였을 뿐이다. 실제로 그 오기가 가공할 힘을 발휘해 9일 동안 산뜻하게 단식행사를 치르고 병원에 입원한 최 대표의 정치적 비중은 한껏 치솟았다. 그래서 정치판이 썩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어떤 행위를 평가할 때는 우선 그 동기의 순수성을 먼저 살펴봐야 한다. 제 아무리 생명을 담보로 한 단식이라 해도 그것이 과연 어떤 동기에서 출발한 것이냐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불법대선자금 모금액의 일부가 드러나자 곧바로 위기의식을 느낀 한나라당과 최 대표가 자신들의 비리에 대해 반성의 기미도 보이기는커녕 서둘러 남의 허물을 들춰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은 아무래도 순수한 의도를 가진 행위로 보여지지 않는다.
단식, 그것은 더할나위없이 고귀한 인간의 생명활동이다. 그러나 그것은 더 많은 생명, 생명의 거룩한 의미를 일깨우기 위한 결행일 때만 고귀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