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병
/채호기
저 꽃병은 자신이 흙이었던 때를 기억할까?
꽃은 산모퉁이에, 들판에
사라지는 목소리들로 사그라지고
꽃이 없는 빈 병이 아름답다.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은
꽃병의 자매였다는 것을 마침내 알아챘을까?
아무것도 꽂지 않았을 때
비로소 자기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죽음 다음에는 그 무엇도 없기에
눈에도 흙을 뿌리고
입에도 귀에도 흙을 채운다.
- 〈문학과 사회〉2015년 봄호
텅 빈 꽃병, 흙으로 돌아간 꽃과 사람, 모두 흙의 자식이었다는 것, 아무것도 꽂지 않았을 때, 장식이 사라졌을 때, 꽃병이라는 이름조차 내려놓았을 때, 남는 것이 비로소 자기라는 것, 보이는 것도 보여 줄 것도 없이, 들리는 것도 들려줄 것도 없이, 말해야 할 것도 대답해야 할 것도 없이, 자연에 돌아간 것, 자기마저 잊어버린 것의 아름다움이란 무가 된 것의 아름다움이고, 비로소 하나가 된 것의 아름다움이고, 그리움으로 기억되는 것들의 아름다움이라는 것. /신명옥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