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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구의 世上萬事]가슴 시린 이름 ‘어버이’

 

유년시절인 1960년대 아버지를 따라 소사라는 인구 3만명의 작은 도시에서 보냈다. 지금은 부천시로 인구 90만명이 넘는 거대 도시가 됐다. 선생님이셨던 아버지는 김포로 학교를 옮기게 돼 시외버스를 타고 1시간 거리를 비포장 도로로 출퇴근하셨다. 초등학생이던 나와 바로 위의 형은 어둠이 짙게 깔리는 저녁 정류장으로 마중나갔다. 우리를 반갑게 맞이한 아버지께서는 차부 앞의 노점상에서 방금 구워낸 따끈한 국화빵을 사 한아름 안겨주셨다. 짜장면 한 그릇 값이 100원도 채 안 되었으니 100원어치 국화빵은 30개는 족히 넘었던 것 같다.

중·고등학생이던 큰형과 작은형도 보던 책을 손에서 놓고 국화빵을 같이 먹었다. 아버지 어머니는 우리 4형제들의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셨다. 부모님은 밀가루와 팥으로 만든 국화빵을 싫어하는 줄로만 알았다. 철 든 후에 알았지만 자식들이 먹는 것만 보아도 배가 부르셨던 것이다. 먹을 것이 변변하지 않은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이내 어머니에게 노란 봉투를 내미셨다. 월급 날이었다. 당시만 해도 선생님은 박봉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튿날 어머니는 100원짜리, 10원짜리 지폐를 딱지처럼 접어 전기세 연탄값 집세 등을 항목별로 나누셨다. 겨울철 자고 일어나면 잉크와 걸레가 꽁꽁 얼던 단칸방에서….

누구나 그렇듯이 살림살이가 빠듯하던 시절이다. 어머니는 이불을 시치고 난 실은 절대 버리지 않고 뒀다가 다시 쓰셨다. 방 청소하다가 나온 머리칼 한움큼씩은 고스란히 모았다가 가발장사에게 팔았다. 팔순이 넘도록 동네를 다니시며 빈 병과 휴지를 모으셨다. 고물상에 가면 몇 천원 달랑 손에 쥐지만 그걸 천금인 양 아끼셨다. 몸에 밴 절약정신으로 우리 4형제 모두를 대학까지 보냈다. 나뿐 아닌 우리네 부모님들의 얘기다.

얼마 전 영화 ‘국제시장’이 우리들의 아버지를 또 생각하게 했다. 피난 길 흥남부두에서 잃어버린 딸을 찾아 나선 아버지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큰아들 덕수에게 “내가 없으면 시방부터는 니가 가장이니까 가족들 잘 챙기라.”는 말만 유산으로 남긴 채. 영하의 주인공 덕수와 같은 우리의 아버지들은 서독에서 광부로, 어머니는 간호사로, 또 베트남 전쟁과 중동 사막의 뜨거운 모래바람을 맞으며 경제발전의 밑거름이 됐다. 피와 땀이 묻은 돈으로 먹고 싶은 것 못 먹고, 입고 싶은 것 안 입으며 아끼고 아껴서 오로지 자식들 뒷바라지만 했다.

나의 아버지는 ‘국제시장’의 주인공 덕수보다는 한 세대 위에 태어났지만 상황은 더했다. 매송면 송라리에서 고개를 넘어 반월공립보통학교까지 왕복 2시간의 십 리길을 다니셨다. 4학년밖에 없던 학교에서 5~6학년이 있는 수원의 학교로 가려니 가정형편도 그렇거니와, 기거할 곳도 없었다. 할 수 없이 11살 어린 나이에 괴나리봇짐을 메고 철 길을 따라 130리 길을 걸어 평택 큰형네 얹혀서 성동보통학교를 졸업했다. 대학을 다닐 때도 노점상을 하며 등록금을 마련했다. 일제강점기와 6·25, 4·19, 5·16 등 청장년기를 격동의 현대사와 같이 하면서 가족과 사회를 위해 희생을 강요당한 분이다. 그러나 난 아버지께 한 거라곤 아무것도 없다. 그저 받기만 했다.

열흘 후면 어머님의 1주기다. 평생 세상에 계실 줄로만 알았지만 88세에 천국으로 떠나셨다. 70년 가까운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으신 아버님은 요즘 외로움을 더 타신다. 그래서 이제까지의 불효를 만회하기라도 하겠다는 생각에 요즘은 아버님을 자주 찾는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이 것밖에 없다는 생각에서다.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은 효도라는 걸 어머니 돌아가시고 뒤늦게 깨달았다. 아버님만이라도 영원히 이 세상에 함께 하시길 바란다면 지나친 욕심일까? ‘어버이…’ 가슴시린 이름이면서도 가시고 나면 불러도 대답없는 이름이다. 정말 소중한 분이면서도 ‘나 살고자’ 너무 잊고 살아왔거나, 효도를 실천하지 못했던 우리네 자식들이다. 오늘만이라도 부모님의 손을 꼬옥 잡자. 어려웠던 시절의 옛 이야기를 서로 나누며 가슴뭉클함을 느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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