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록이 눈부시다. 가정의 달 푸른 오월이 가고 있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성년의 날이 달력을 채우고 있다. 각각의 위치에서 가정의 소중함을 생각하게 하는 달이 오월이다. 최근 결혼 연령이 늦어지고 육아 예능프로그램이 인기를 끌면서 조카 바보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다. 딸 바보나 손 자바보라는 말은 익숙하지만, 조카 바보라는 말은 좀 생소하다. 바보는 바보일까?
바보라는 말은 사리분별이 부족하고 지능이 떨어지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하지만 내 마음을 몰라주는 사람도 바보이고, 자신을 돌보지 않고 베푸는 사람도 바보이고, 순진하고 착하기만한 사람도 바보라고 한다. 원래 바보라는 말은 ‘바보 온달’이나 ‘바보 이반’과 같이 대상의 앞에 붙여 쓰였다. 조카 바보와 같이 대상의 뒤에 붙이면 주체가 바뀌게 된다.
몇 해 전 동성중고교 개교 100주년전에 김수환 추기경이 직접 그린 자화상 ‘바보야’를 출품해 화제를 모은 적이 있다. 파스텔로 간략하게 윤곽을 잡고 이목구비를 나타낸 자신의 얼굴 아래에 ‘바보야’라고 쓴 그림이다. 자화상의 ‘바보야’는 자신에게 한 말일 것이다. 받아들이는 사람은 일상적인 바보의 개념을 초월한 순진하면서도 신성한 개념의 바보를 떠올린다. 한없이 낮추고 한없이 베풀며 살아 온 그의 삶이 바보라는 단어로 집약되기 때문이다.
조선의 문장가 장유(張維, 1587~1638)는 ‘바보를 파는 아이’ 라는 시를 지었다. 옛날 섣달그믐 날 아이들이 총명해지기 위하여 바보를 파는 풍속이 있었는데, 그 광경을 그린 작품이다. 아이들이 마을을 돌며 ‘내 물건을 사달라’고 외친다. 지나던 한 노인이 ‘무엇을 팔려 하느냐?’ 묻는다. 아이들은 자신을 붙잡고 있는 바보를 팔겠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노인이 당장 값을 후하게 주고 사겠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노인은 아이들에게 말한다. “인생살이에 총명은 필요치 않다. 총명이란 원래 근심만 안기는 게 아니더냐. 온갖 걱정 만들어 마음의 평화를 깨고 온갖 재주 부려 책략을 꾸민다. 환하게 빛나는 기름 등불 보거라. 자신을 태워 없애지 않느냐.” 이것이 노인이 아이들에게서 바보를 사겠다는 이유이다. 그러면서 그는 “눈 밝지 않아도 볼 것은 다 보이고, 귀 밝지 않아도 들을 것은 다 듣는 것이니”라는 말로 글을 맺고 있다. 이 글에서 아이의 반응은 언급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애써 팔려고 하는 바보는 언젠가는 꼭 필요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어머니는 천수를 누리고 97세에 세상을 마감하셨다. 겨우 한글을 깨우치고 학교라고는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다. 열여섯에 혼인하여 8남매 낳아 길렀다. 아주 드물게 고손까지 보셨다. 많은 식솔 거느리고 온갖 풍파를 겪으며 거친 세상을 사셨다. 나이 들어서는 ‘나는 바보여’라는 말씀을 입에 달고 사셨다. 허술한 밥상을 받고도 ‘맛있다. 참 맛있다.’ 하셨고, 자식들의 작은 성의에도 그저 ‘착하다. 고맙다’였다. 허물을 애써 덮어주고 결코 험담을 하지 않으셨다. 어머니의 삶에 자신은 없었다. 스스로 바보라고 하셨지만, 바보 어머니는 바보가 아니었고 현명하고 어진 어머니였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큰 손으로 집안의 규율과 기강을 잡아주셨다. “어리석은 것은 반드시 어리석은 것이 아니다. 분명하고 똑똑하다 하여 그것이 총명한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 학자 성현(成俔, 1439~1504) 선생이 한 말이다.
세상은 변하여 손주 바보, 딸 바보가 나오더니 조카 바보란 말이 나왔다. 더 큰 사랑은 허물을 덮어주고 지친 마음을 다독여주는 바보 어머니의 사랑이다. 그 사랑은 바보이상의 경지에서 나온다. 노여워하지 않고 베풀고 받아들이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성인과 바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가정의 달, 오월에 바보 어머니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