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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정조의 건축]월근문(月覲門)속에 숨어있는 위계(位階)

 

현대인이 힘들 때 본인의 종교시설을 찾아 기도하는 것처럼, 조선의 국왕들도 힘들 때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종교시설인 종묘를 찾아 조상신에게 기도를 하였다. 정조는 종묘보다는 경모궁(사도세자 사당)을 더 많이 찾았고 편하게 이곳을 가기위해 담장을 허물고 문을 새로 만들었다. 창경궁 쪽은 월근문이고 경모궁 쪽은 일첨문인데 경모궁이 없어지면서 일첨문도 없어지고 현재는 월근문만이 남아 정조의 발걸음을 기억하고 있다.

월근문은 정문(正門)이 아닌 부문(副門)이지만 국왕이 사용하는 중요한 문이다. 형태는 2칸(間)으로 각 칸의 크기와 높이가 다르게 구성되어 보는 사람의 의구심을 잦아낸다.

궁궐도(북궐도, 동궐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국왕과 왕비가 머무는 집(전-殿)의 전문(殿門)은 3칸이고, 왕세자(동궁)가 머무는 집(당-堂)의 문은 2칸으로 되어있다. 그 외 궁궐의 여러 곳에도 2칸의 문이 보이는데 외부로 통하는 담장의 위치에 있고 또 대보단 등의 제사시설에서 보인다. 그러므로 2칸 문은 동궁의 영역과 나라의 중요 의례가 아닌 경우 국왕이 사용 한 문으로 볼 수 있다.

월근문의 지붕높이는 약 5.4m(18척)이고 서측 칸(외부에서 볼 때 왼쪽 칸)이 동측 칸(외부에서 볼 때 오른쪽 칸)에 비해 0.6m(2척) 낮다. 건물 폭은 약 6.6m(22척)으로 동측 칸(間)이 3.6m(12척), 서측 칸이 3m(10척)로 동측 칸이 서측 칸에 비해 높고 폭도 크다. 월근문에는 현재 현액(縣額,현판)이 없지만 홍화문의 남쪽에 있는 2칸 문인 선인문에는 건물의 중앙이 아닌 동측 문 위에 걸려있어 월근문도 동측 칸에 현액이 걸려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차이를 둔 것은 국왕이 동측을 사용하고 신하는 서측의 작은 문을 사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삼문일 경우 중심 칸에 위계를 높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2칸 문에서 동측 문에 위계를 둔 기준은 무엇일까? 시초는 자연의 변화를 기준으로 삼았을 것이다, 우리문화권이 속한 북반구는 위치가 변하지 않은 북극성을 배경으로 한 북쪽(남면)을 첫 번째로 보고 그를 대면하는 남쪽(북면)을 둘째로 치며 그 다음이 해가 뜨는 동쪽(서면)과 해가 지는 서쪽(동면)의 순서로 방향의 위계를 결정하였다.

동서 방향의 위계에 대해서는 남녀 위치에서 남자는 양(陽)으로 동(東)이고, 여자는 음(陰)으로 서(西)로 하였다. 또 궁궐 정전 앞 품계석에 신료들이 동쪽에는 문인이 서쪽에는 무인이 자리 함으로 서보다는 동을 더 우대하였다. 좌의정과 우의정을 보면 정1품으로 직급은 같지만 좌의정의 위계를 더 높게 본다. 이는 국왕의 중심에서 보면 좌의정이 동측에 있기 때문이다. 바라보는 기준은 남면한 주체를 기준으로 하여 좌(左)를 동측, 우(右)를 서측으로 좌청룡, 우백호를 부르는 방향과 같다. 현대의 결혼식에서 동측에 신랑이 서측에 신부가 서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예(禮)의 시작이라고 하는 공자(孔子 B. C.551~479)가 방향의 위계에 대해 이야기 한 기록에서는, 「예기(禮記)」 곡례(曲禮)상(上) 중 ‘손님을 대하는 방법’에서 “손님은 서쪽계단으로 오르고 주인은 동쪽계단으로 오른다. 단 손님의 직급이 주인보다 낮은 때는 주인이 서쪽계단을 사용한다.”라고 되어있어 당시에는 해 뜨는 동쪽보다 하루가 끝나는 서쪽을 더 높게 본 것 같다. 아침이 소년이라면 점심은 청년이고 저녁은 장년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서측보다 동측의 위계가 더 높아졌다. 유교는 근본을 중히 여기므로 바다 보다 강에 먼저 제사를 하듯이 해지는 서쪽보다 해가 뜨는 동측을 우선하는 사상으로 변하였다고 본다. 방향의 위계는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다른 해석을 한 것이다.

월근문은 동측을 우선하는 기준에 따라 동측 문을 크고 높게 만들어 국왕이 사용하기에 적합하도록 만들었으며 특이한 2칸 문의 형태는 궁궐을 제외한 지역에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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