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온라인에서 유행하는 글이라는 부연 설명과 함께 후배가 어제 장문의 카톡을 보내왔다. ‘두 사람 다 건강한 양심의 주인공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의 베끼기는 격렬하였다. 출판사는 바깥에서 돌아와 흙먼지 묻은 얼굴을 씻는 여자를 안타까워하다가도 원고를 달라며 여자를 채근하는 일이 매번이었다. 첫 표절을 하고 두 달 뒤 남짓, 여자는 벌써 표절의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다. 여자의 청순한 머릿속으로 문장은 향기롭고 풍요롭게 젖어들었다. 그 문장은 글을 쓰는 여자의 원고지 속으로도 기름지게 스며들어, 이젠 여자가 표절을 하는 게 아니라 표절이 여자에게 빨려오는 듯했다. 여자의 변화를 기뻐한 건 물론 출판사였다.’ 카톡을 보고 인터넷을 뒤지니 이런 패러디도 있었다. ‘무급 인턴이 된 지 한 달 남짓, 나의 몸은 벌써 열정 페이를 아는 몸이 되었다. 저속한 자기 합리화 속에서도 밥값이라도 주시는 게 어디냐는 온정은 풍요롭게 나의 몸에 스며들었다. 물론 나의 변화를 가장 기뻐한 것은 사장님이었다.’
모두가 소설가 신경숙씨가 베낀 것으로 의심을 받는 단편소설 ‘전설’의 한 문단을 패러디한 것들이다. 사회적으로 일파만파 번진 표절사태를 고스란히 담고 있으며 사회에서 한국문학을 조롱하는 일이 유행처럼 된 것으로 보여 마음 씁쓸했다.
아직도 외국인들은 우리 사회를 정치계, 경제계는 말할 것도 없고 교육계, 문화계, 심지어 종교계에까지 연줄과 연고 네트워크가 횡행하는 ‘엘리트 카르텔형 부패사회’라고 보고 있다.
이 같은 실상을 김영란 전 대법관도 지적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바로 연줄문화, 연고관계다. 연고관계에 반드시 돈이 따라오지는 않지만, 그 고리를 끊지 않는 한 공정한 룰도 제대로 작동할 수 없을 뿐더러 부수적인 관계가 고착화돼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선 더 좋은 사회로 한 발짝 나아간다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다고도 했다. 이번 신경숙씨 표절시비를 보며 이 같은 논리에 대비시킨다면 너무 비약적일까?
법조계 향판이 문제 됐을 때 그들만의 리그였고, 황제 노역 논란은 이를 눈감아 줄 수밖에 없는 정부기관의 현실과 도덕적 해이에 물든 사회가 만들어낸 공동작품이라는 말이 넘쳐나기도 했다. 이번 신경숙씨의 표절시비도 이런 것들로부터 비롯됐으며 내용 또한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게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표절문제를 제기해도 실어주는 문예지가 없다든지, 기득권을 갖고 있는 일부 원로 문학인들로부터 질책과 냉소를 받기 일쑤라든지 하는 자괴 섞인 말들이 그것을 반증하고 있어서다. 이번의 신경숙씨 문제도 10여 년 전부터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문제도 제기했으나 소위 잘나가는 문인들은 외면했고 수면으로 떠오르기도 전에 묻혀 버리기 일쑤여서 더욱 그렇다.
이번에 표절문제가 불거졌을 때도 신경숙씨와 카르텔을 형성한 많은 이들이 민낯을 드러내는 데 인색했다. 소속 출판사는 더했다. 독자들의 분노에 가까운 질타가 있고 나서 마지못해 두루뭉실 사실을 인정하는 태도를 취했다. 표절시비가 처음 제기됐을 때 신씨를 옹호했던 원로 문인들과 몇몇 출판사, 그리고 일부 평론가들은 아직도 침묵하고 있다. 심지어 다른 문인들의 표절에 관해 심할 정도로 집착했던 신경숙씨의 남편마저도 말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우리의 문학계가 법조계의 향판처럼 그들만의 리그를 치르며 난공불락의 카르텔을 형성한 모양새라는 말이 안 나오겠는가.
그간 우리나라 학계나 문단, 대중문화계는 표절에 엄격한 잣대를 겨누지 않았다. 따라서 이러한 관행을 대충 눈감아주는 침묵의 카르텔도 덩달아 강화됐다. 그리고 그 속에 있는 당사자는 표절 의혹이 일면 본 적도 없는 작품이다, 참고만 했을 뿐이지 표절이라고 할 수 없다고 발뺌하며 빠져나가기 일쑤였다.
이러한 둥지(?) 속에서 부와 명예를 거머쥔 신씨가 어제 모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표절시비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결과는 불난 데 기름을 부은 꼴이 되고 말았다. 죄송하다고 하면서도 애매한 표현으로 다시 한 번 독자들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표절여부는 본인이 더 잘 알고 있다. 사람들이 표절이라고 하니 표절 같다는 표현은 양심이 최우선 덕목인 창작자로선 해서는 안 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