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금 인출기
/김기산
현금 인출기 앞
기계는 나를 향해 명령한다
카드를 넣고 암호를 누르시오
스르르 내가 열린다
더는 숨을 곳이 없다
마이너스로 차곡차곡 쌓인 골 깊은 주름살
출혈과 수혈의 균형이 깨져있다
오랫동안 앓고 있는 중병을 눈치 채고
마이너스 연장을 하라 한다
통장을 들고 은행 안으로 들어서니
따가운 시선이 온몸에 달라붙는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경비원에게 대답할 용기가 없어
그 길로 돌아 나온다
몇 푼의 잔고가 나를 따라온다
다급할 때마다 수없이 나를 인출해 썼다
-계간 리토피아 봄호에서
※김기산 시집 ‘노을을 베끼다’ 제24회 성균문학상 수상.
인생에도 경제원칙이 적용될 수 있을까. 인생의 수지 타산은 어찌 맞추는 것이 가장 잘 살았다고 볼 수 있을까. 살다보면 출혈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수혈은 한계가 있다. 출혈을 메꾸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해 보지만 그러다보면 마지막 자존심까지 무너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수혈이 넘쳐나 자손에게까지 넘겨줄 수 있기를 고대하지만 우리는 정작 어쩔 수 없는 출혈을 메꾸기에도 너무 벅차 허덕이곤 한다. /장종권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