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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시산책]글자 위의 낙관

글자 위의 낙관

                                         /김길나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꾸려 넣은 책* 속에

‘대부분의 생물은 매우 작아서 간과하기 쉽다’ 라는

문장을 지나온 어디쯤에서 나는

매우 작은 날파리 한 마리를 만났다

고것이 책 안으로 날아들면서

내 정신은 산만해졌다. 펼쳐진 책장이 마치

제 비행장이나 되듯이 고것이 자꾸만 글자들을

제 날개 밑에 탑재해 책 밖으로 옮겨 나르고

책의 글자가 여기저기서 사라진다. 나는

사라진 글자들을 조합해내지 못해 불안해진다

제 비행 회로를 빠른 선회로 감추며

책에서 컴퓨터 모니터로 옮겨 앉은 고것이 다시

실어낼 글자를 물색하려는지 책으로 회항하고

책에 착지한다. 이때 나는 기회를 잡는다

책을 덮어 눌러버린 것이다

‘거의 모든 것의 역사’ 속에

고것의 눌린 자국이 선명하다

책의 글자를 책 밖으로 실어 나른

날개가 납작 꺾이어

책 속에 먹빛 낙관으로 찍힌 것이다


*빌 브라이언. ‘거의 모든 것의 역사’

-김길나 시집 ‘홀소리 여행’ 중에서

 



 

우리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얼마나 더 많은지 알 수가 없다. 눈에 보이는 것을 쫒아 달려가기 때문이다. 신호등 불빛이 바뀌면 경적소리가 일초, 이초, 삼초 지나가기도 전에 등 뒤에서 들린다. 작은 날파리 한 마리의 등장으로 책을 읽는 시인은 글자를 조합하지 못하고 불안하다. 정신이 산만해진다. 발칙한 초파리 한 마리에 대항하는 시인의 손이 드디어 기회를 잡는다. 그것은 책을 덮어버리는 방식으로 끝난다. 우주 탄생부터 현재 인류 출현까지 그 많은 역사가 한 권에 담겨 있는 ‘거의 모든 것의 역사’ 라는 책. 그 책에 제 몸으로 낙관을 찍은 초파리. 책은 글자라는 형식을 빌리지만 보이지 않는 것으로 가득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거의 모든 역사는 과학일까. 보이지 않은 진실을 보라고 초파리는 세상 밖으로 글자를 실어 날랐던 건 아닐까. 초파리보다 작은 우주인간. 진실을 간과했던 거짓 역사를 시인은 덮어버린 것 아닐까. 시인의 눈빛은 맑고 단호하다. /김명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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