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수첩
/최동문
매일 분해한 시계를 조립한다.
맨발로 걸어도 생채기 없는 길에
시간을 고치면 톱니바퀴 속에서
흰 비둘기 날개는 울음이 된다.
나는 짧은 머리가 길 때까지
여행길에서 평화를 팔았다.
그러다가 지치면 집으로 돌아와
시든 제라늄에게 물을 주고
배고파 우는 고양이에게 멸치를 먹이고
검은고양이 눈 속에 앉아
찬밥에 된장을 섞어 비빔밥을 먹었다.
외로움에 길든 나를 용서할 수 있을까.
세상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여행 끝에야 알 수 있었다.
바람은 잠시 잠을 잘 뿐이다.
- 최동문 시집 ‘아름다운 사람’, 리토피아
외로움에 길든 자신을 발견하는 기분이란 또 얼마나 외로운가. 외로움의 병이 깊으면 환상에 닿는다. 외로움은 분해된 시계다. 다시 조립해본들 반복되는 톱니바퀴다. 짧은 머리가 길어질 때까지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중얼거려보는 헛된 평화. 고양이는 배고파 울고 우는 고양이 눈 속에 앉아 찬밥에 된장을 비벼 먹어도 다시 외로움. 시가 아픈가, 시인이 아픈가. 세상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이 외로움 끝날 수 있다면. 그러니 바람이 깨어나면 외로움이여, 시인이여, 부디 그 바람처럼 무심하시라.
/이미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