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13 (금)

  • 구름많음동두천 17.6℃
  • 맑음강릉 20.3℃
  • 구름많음서울 18.2℃
  • 맑음대전 18.5℃
  • 맑음대구 19.0℃
  • 맑음울산 20.0℃
  • 맑음광주 18.4℃
  • 맑음부산 19.1℃
  • 맑음고창 18.4℃
  • 맑음제주 21.3℃
  • 구름많음강화 15.3℃
  • 구름조금보은 17.3℃
  • 맑음금산 18.1℃
  • 맑음강진군 18.7℃
  • 구름조금경주시 20.7℃
  • 맑음거제 19.7℃
기상청 제공

[끝나지 않은 정조의 건축]어머니 혜경궁을 위한 건축 (下)

 

정조는 어머니를 위한 건물인 자경전(慈慶殿)을 지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자경전 터의 안내판에는 ‘자경전은 경모궁을 향하도록 지었다’라고 쓰여 있으며, 또 항간에는 ‘자경전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어머니에게 복수를 하기 위한 건축으로, 혜경궁이 출입할 때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景慕宮)을 보이게 하여 고통을 주기 위한 것이다’라고 하는 주장도 있는데, 과연 자경전은 경모궁과의 건축적 관계가 있는 것이지, 아니면 왕비가 되지 못해 대비의 칭호는 받지 못하지만, 아들을 위해 평생을 살아온 어머니를 위한 효(孝)의 건축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자경전의 입지와 배치에 대한 분석

정조 처소와 거리: 임금의 집무소인 창덕궁의 희정당(熙政堂)에서 혜경궁 침소인 경춘전(景春殿)은 직접 갈 수 없어 멀리 돌아가거나 새로운 동선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도 창덕궁과의 높이 차이로 계단을 설치가 필요하므로 쉽지 않았다. 그러므로 새로 지어질 왕대비전의 위치는 정조의 거처와 가까운 거리이고 계단 없이 갈 수 있는 곳으로 선정할 수밖에 없었다. 순조는 ‘자경전기(慈慶殿記)’에 “희정당과 자경전의 거리는 수십 보(1.8m/보)에 밖에 안 돼 아침저녁으로 문안드리기 쉬운 곳이다”라고 되어 있어 정조는 어머니의 처소를 가까운 곳에 만들고자 한 것을 알 수 있다.

조경 부분: 동궐도(東闕圖)를 보면 자경전은 마당을 중심으로 북쪽에 본채가 있으며 정면 7칸이고, 나머지는 3면은 부속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본채의 뒤에는 화계가 설치되어 있고 많은 꽃나무와 관목들이 보이며 뒤로 담장이 있다. 또 뒤에는 소나무 숲이 있는데 담으로 둘러쳐져 있어 자경전의 전용으로 보인다. 이 소나무 숲의 뒤가 금원(禁苑)의 부용정(芙蓉亭) 영역이다. 대문 앞 동쪽에는 작은 둔덕이 조성되어 있고, 여기에는 큰 소나무 3그루가 있어 동쪽의 시야를 막아주며, 좋은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다. 대문 앞 서쪽은 유서 깊은 환취정이 있는데 이 건물을 부속 건물로 사용하였다.

방위 부분: 자경전의 동남쪽에 경모궁이 있어 그곳을 바라보게 동향 건축을 하였다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창경궁 자체가 동향(東向)이고, 혜경궁의 기존 침소인 경춘전과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도 동향하고 있어, 동향의 자경전을 건축해도 크게 규범에 어긋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경전은 경모궁의 있는 동쪽을 외면하고, 남향건축을 하였으며 동쪽을 막고 서쪽을 열고 있다.

진입 부분: 자경전의 출입은 사방에서 할 수 있으며, 동쪽은 작고 긴 골목길이 있는데 이 골목의 끝에는 공주(公主)와 부마(駙馬)를 위한 건물 등이 있어 이 길을 통해 창경궁 밖으로 나가기는 어렵다. 서쪽은 바깥마당이 있고 창덕궁과 연접하고 있어 주 출입구는 서쪽으로 본다. 남쪽은 계단을 내려가서 통명전의 뒤편이 나오므로 주출입구로는 적당하지 않다.

위계 부분: 자경전이 높은 위치에 있는 관계로 창경궁의 어디에서도 자경전이 우러러보게 되어 있으며, 창경궁의 가장 깊은 곳에서 남향하고 있으므로 모두를 내려다보는 형태이다. 영역의 크기는 창경궁의 법전(法殿)인 명정전 다음으로 크며, 존엄함에서도 법전과 같다고 한 ‘자경전기(慈慶殿記)’의 기록을 보듯이 위계는 다른 곳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자경전의 위치는 정조가 어머니를 가까운 거리에서 모시고자 하여 집무실인 희정당에서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창경궁 내 장소였으며, 언덕에 있는 관계로 창경궁이 한눈에 다 보이고, 건물의 위계가 돋보였다. 또한 주변 경관이 매우 뛰어난 곳으로, 후에 동궐의 공식연회장소로 사용할 만큼 뛰어난 입지를 자랑하기도 하였다. 문제가 되는 경모궁과 시선 관계에서는 경모궁의 뒤에 언덕이 있어 서로 볼 수 없었다.

자경전의 건축개념을 살펴본 결과 정조의 진정한 효 정신에서 나온 것임을 확인하였고, 경모궁과의 건축적 관계를 어디에서도 찾지 못했다.

연산군이 어머니의 복권을 힘으로 진행해 실패하여 퇴위 되었기에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복권 대안으로 힘이 아닌 효(孝)를 선택하였다. 효를 정책으로 한 정조는 아버지, 어머니를 구분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한 어머니에게 복수는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다.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