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일전 모처에 있는 아주 오래된 야학(夜學)엘 들렸었다. 어찌나 오래되었던지 금방이라도 꺼져 내릴 듯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이 잊히지 않는 허름한 건물 한 귀퉁이가 교실이었다. 대학생들이 십시일반 쥐꼬리만 한 용돈을 털어 가르치면서 교재도 마련하고 방값도 치른다는 눈물겨운 사연을 담은 야학이었다.
희미한 불빛이 배어나오는 야학에는 낡은 의자와 책상 그리고 지금은 어디서도 찾아보기조차 어려운 빛바랜 몽당연필이 눈에 띄었다. 어릴 적 열심히 깎아대며 부러질세라 살살 써 내려가던 추억 속 몽당연필이 무척이나 반갑고 정겨웠다. 마음 한편이 뭉클해져 오며 울컥했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오래고도 새로운 일상’으로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젊은 대학생 선생님들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심훈선생의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이 부활한 듯 교실을 지키는 대학생들의 모습이 마치 ‘ 우리 사회 마지막 양심의 보루’ 처럼 느껴졌다.
손자뻘 되는 젊은 선생들의 손을 잡고 연신 고마움을 표하시는 눈시울 그윽한 어르신들이 빼곡히 모이신다. 지팡이 없이는 걸음조차 힘겨운 어르신들, 그러나 성성한 백발을 화려한 꽃무늬 모자로 눌러 한껏 멋을 부리신 어르신들, ‘나는 행복 합니다’라는 노래가 금방 흘러나올 듯 행복감이 넘쳐나는 그런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옹기종기 모여드신다.
그리곤 이내 받아쓰기 장을 펼쳐 놓고 어린아이들처럼 신기해하며 몽당연필을 쥐고 공부 삼매경에 빠져드신다.
세상은 그들을 한 때 까막눈‘이라 불렀다. 글의 소경 ‘문맹(文盲)’이라고도 했다. 이 땅에 보릿고개가 아주 심했을 무렵 힘겹게 자식들을 줄줄이 낳아 기르고 가르쳐 이 땅에 놀라운 ‘한강의 기적’을 일군 산업인력 전사들의 어버이들이시다. 못 배운 평생의 한을 간직하고, 온 몸이 바스러지도록 희생적으로 헌신하여 자식들을 세계적 인물로 키워내신 분들이 바로 그 분들이시다.
‘할머니는 일학년’이라는 이 몽당연필의 새 주인들의 이야기를 담아냈던 영화 한편이 떠오른다. 필자는 이 분들을 더 이상 문맹, 비문해자, 늦깎이 할머니 학생이라 부르고 싶지 않다. 아시는 가? 이 분들이 수백만에 이른다는 사실을…. 연전에 있었던 국립국어원의 한 조사에 따르면 초등학교나 의무교육인 중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 채 심각한 문자생활의 불편을 겪으며 ‘주눅 든 삶’을 살아가고 계신 분들이 아직도 이 땅에 여전히 무수히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필자는 생생히 기억한다. 헌법과 교육기본법, 평생교육법이 보장하고 있는 이 분들의 잊힌 교육, 잃어버린 교육관들을 조금이나마 되찾아드리고 싶어 애쓰던 그 시간들을 말이다. 평생교육 6대 영역의 제1영역인 문해교육 예산 확보와 프로그램 개발, 학력인정제도 마련, 문해교원 양성 연수, 문해교육 교과서 개발, 국가문해교육진흥위원회 구성, 운영, 전국문해교육시화전, 문해 거점교육기관 지원 등등…. 전국을 발로 뛰며 문해교육의 진흥을 일구던 시간들이 기억 속에 새롭다.
그 어떤 예산 증액도 손사래 치던 국회위원들도 문해교육 예산만큼은 너무 적다고 오히려 증액을 요구하는 일들이 많았다. 바로 그 문해교육의 주인공들이신 몽당연필의 새 주인들은 오늘도 그렇게 그리 많이 남지 않은 인생의 소중한 시간들을 귀히 모아, 마치 돋보기가 빛을 모으듯 그렇게 열심히 배우고 또 배우는 공부 삼매경에 빠져들고 계신다.
한글 공부를 마치신 어르신들이 삶 속에서 진향으로 배어나오는 이야기들을 모아 삐뚤삐뚤한 한글 솜씨로 자아내는 위풍당당 삶을 노래하다‘ 문해 시화전이 올해도 한글날을 기해 어김없이 열릴 것이다. 그 곳에서 난생 처음 시인으로 등단하시어 시화전과 함께 책까지 출판하신 문해 시인 할머니들을 뵐 수 있다. 어르신들 중에는 내친 김에 자신의 진한 삶을 생생하게 원고지에 녹여 내어 눈물겨운 감동의 자서전까지 출판하시는 경우들이 늘고 있다.
질곡의 삶을 딛고 일어서, 위풍당당 무소의 뿔처럼 남은 생을 희망으로 노래하시는 어르신들에게 세상 속 뜨거운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다. 그 어르신들을 ‘위대한 대한의 어머니’라 불러드리고 싶다. 세상은 어르신들 당신들이 계셔 ‘희망’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