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져 새벽에는 춥다는 말이 나오며 옷을 겹쳐서 입게 된다. 더워 더워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가을이 어느새 곁으로 다가왔는지 새삼 놀랍다. 하늘은 마음껏 푸르고 한 없이 높아졌다. 어디선가 고추잠자리가 보일 것도 같은데 아직 잠자리의 날갯짓은 보이지 않고 고추 말리는 이야기들이 무성하다. 연배가 조금 위인 분들은 벌써 마늘 손질도 끝내시고 이렇게 날씨 좋을 때 고추 말려야 한다고 하신다. 살림살이라는 것이 그냥 세월 따라 저절로 흘러가는 듯해도 막상 하다 보면 끝이 없는 일 또한 가사일이다. 해도 해도 티도 안 나는 일이라는 말이 꼭 맞는다. 요즘은 하루 세끼 집에서 먹는 사람이 드물어 삼식이라는 농담조의 말도 있지만 한끼를 먹어도 집에서 먹는 밥만한 게 없지 싶다. 나이를 먹어도 엄마가 해주던 밥이 그립고 김치 하는 엄마 옆에서 얻어먹던 무쪽 맛은 지금도 생생하다. 철따라 밑반찬 고루 장만해 두고 장맛 좋고 김치 잘 담그는 집은 언제나 푸짐한 밥상이 차려지고 온 가족이 행복한 상상을 하며 밥때를 기다리곤 한다.
요즘은 유명 연예인이나 운동선수 못지않게 요리 잘하는 사람이 스타로 각광을 받고 있다. 한 때는 먹방이라고 해서 주로 먹는 쪽을 보여주더니 이제는 쉐프테이너라 불리는 스타급 요리사들이 등장해 온갖 요리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주며 출연자들의 눈과 입을 즐겁게 해 주고 우리의 미각을 자극하고 있다. 그들도 입담에서 요리에 대한 풍부한 상식과 외부인들이 잘 알지 못 하던 유학 시절의 경험담이나 여행기 등의 소소한 이야기들이 방송을 넘어 신문 지상에도 등장한다. 이미 요리는 특정인들을 더 특별하게 만들어 주었고 먹는 모습보다는 요리에 직접 참여하고 대중화 하는데 무게가 실리고 있다. 거기에 맞추어 대부분 잘 생기고 젊은 남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젊은 청소년들의 관심 또한 높아지고 있는 현실이다.
우연한 기회에 몇몇 젊은 사람들과 자리를 하게 되었다. 그들 중에는 미혼인 사람들도 있었지만 부부도 있었고 특히 주말 부부가 있었다. 주말 부부들은 서로의 직장이 멀리 있는 관계로 부득이 별거를 하게 되어 견우직녀보다 조금 더 자주 만난다며 서로를 아쉬워 하는 편이었다. 물론 대부분은 남자쪽에서 아내의 부재로 인한 일상의 불편함과 아이들이 눈에 밟힌다는 얘기였다. 듣고 있던 아내쪽에서도 남편의 말에 동조하면서도 자신들의 불편과 아쉬움도 얘기를 하며 서로를 애틋해 했다. 그러나 함께 지내는 부부쪽에서는 대놓고 부러워하는 눈치다. 먹는 것도 대충하면 되고 잔소리 안 듣고 얼마나 좋으냐며 툴툴대자 남편이 맞받아친다. 사실 결혼해서 아침밥 차려 준 적이 몇 번이나 되는지 손가락으로 셀 정도라며 그냥 아이 낳아 길러주는 것만 감지덕지 해서 살아주고 있으니 고마운 줄 알라고 엄포 아닌 엄포를 놓는다.
하기야 인류 역사에 있어 먹는 일처럼 중차대한 일이 있었을까? 먹는 유혹이 얼마나 크고 떨치기 어려웠으면 하와가 하느님을 잃고 낙원을 잃었을지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그러나 아무리 일류 요리사의 손으로 차려진 진수성찬이라도 엄마의 사랑과 정성으로 차려진 소박한 밥상과 비교할 수 있을까? 쌀쌀해진 날씨에 제법 토실토실한 고구마가 나와 있다. 얼른 씻어 쪄서 껍질째 먹으니 삶은 밤 맛이 난다. 고구마 몇 개로도 둘러 앉아 웃을 수 있는 행복한 가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