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유안진
천천히
담담하게
조용히
객쩍고 미안하게…
이런 말들과 더 어울리는 오후午後
그래서 오후가 더 길다
지는 해가
더 처절하고 더 장엄하고
더 할말 많고
더 고독하지만
그래서 동치미 국물보다 깊고 깊은 맛이여
그런 오후를 살고 싶다
- 유안진 시집 ‘세한도 가는 길’에서
하루는 오전과 오후 각 12시간씩 구성되어 있다. 그럼에도 오전보다 오후가 더 지루하고 길게 느껴진다. 그것은 오전의 대부분은 수면시간이며 하루를 시작하고 준비하는 분주한 아침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이 시를 통하여 인생을 80살로 볼 때 40대 이전은 오전, 40대 이후는 오후로 이미지화 했다. 패기와 열정으로 시작하는 오전은 젊음의 상징으로서 돌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리다보니 반평생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른다. 그러나 오후는 인생의 가치와 삶의 농도를 감지할수 있는 경험과 연륜을 갖고 있다. 좀 더 여유롭고 능숙하다. 그래서 담담하고 처절하고 고독하고 할 말이 많다. 인생의 멋을 즐기며 향유할 수 있는 오후, 떨어지는 태양이 붉고 장엄하게 보이는 이유다. /정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