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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으로 풀어본 무예]‘무(武)’를 사랑한 군주, 정조(正祖)

 

18세기 조선사회를 말할 때 정조의 개혁정치는 늘 화두의 대상이었다. 특히 규장각을 통한 인재양성과 문예부흥은 당대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요소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정조의 개혁정치의 핵심은 강력한 군권장악 및 새로운 국정 운영의 철학이 뒷받침 되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이는 생부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갇혀 죽게 만들 정도로 강력한 정치력을 형성한 노론들이 중앙 군영의 핵심 요직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수원 화성을 방어했던 장용영을 통한 중앙군영의 실질적인 통제를 위해서는 기존 정치권력의 핵심인 집권 사대부의 해체 및 새로운 인재양성이 필수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정조의 개혁정치를 위한 독특한 ‘무(武)’ 중심의 국정운영철학을 요약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정조가 즉위 초반부터 제기한 성리학(경학)에 대한 비판 및 문무겸전론의 설파는 당시 기득권층인 노론을 압박하기 충분하였고, 국정장악을 위한 새로운 정책방향이 되었다. 특히 새로운 국정운영의 철학으로 즉위 초반부터 제시한 ‘무’ 중심의 문무겸전론은 당색에 치우쳐있던 문신들을 압박하는 좋은 수단이 되었다. 보통 정조 이전의 문무겸전론은 군사들을 지휘하는 장수들에게 한정하여 유학적 교양을 요구하는 논리였으나, 정조대의 문무겸전론은 문신들에게도 직접적으로 적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무’를 중심에 둔 국정운영철학으로 발전시켜 이전과는 다른 의미로 해석된다.

다시 말해 정조의 독특한 문무겸전론의 관점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무인이나 장수에게 요구된 유학의 교양으로서의 문무의 병립이라기보다는 그동안 천시되었던 ‘무’ 대한 새로운 인식을 통해 이를 국정운영철학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따라서 정조가 제기한 문무겸전론의 핵심에는 문무병용보다는 무적 기풍의 확산을 통한 국정쇄신이라는 의미가 더욱 깊게 자리잡고 있어 ‘문예군주’라기 보다는 ‘무예군주’라는 표현이 보다 적절할 듯 보이는 행보를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정조만의 독특한 문무겸전론은 ‘대전통편’의 경우 비록 법전이지만 이전의 법제 정비 사업과는 다르게 병전을 중심으로 법제를 변화시킴으로써 ‘무’에 대한 중요성을 환기시킬 수 있었다. 이후 연달아 편찬한 병서인 ‘병학통’과 ‘무예도보통지’에는 모두 ‘통(通)’이라는 글자를 집어넣어 정조대 이른바 ‘삼통(三通)’을 완성하게 된다. ‘삼통’은 정조대 무와 관련된 법제, 진법, 군사무예의 표준화와 광역화를 위한 초석이 되었으며, 이를 통해 ‘무’ 중심의 문무겸전론의 설파가 가능하였다.

이와 함께 이순신과 임경업, 김덕령 등 무장에 대한 대대적인 숭모사업을 국가적 진행하는 등 무의 중요성을 각인시키는 작업이 함께 이루어져 정조의 국정운영 철학은 더욱 보편화 될 수 있었다. 특히 무장으로서 이순신의 업적에 대한 재평가와 문집간행을 대대적으로 추진한 것은 ‘무’ 중심의 국정운영 철학의 확산을 위한 시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정조가 쉼 없이 실천하고자 했던 개혁의 핵심에는 ‘무’ 중심의 문무겸전론을 바탕으로 기존의 기득권 세력들을 정신적으로 통제하려 하였던 것과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하여 지속적으로 간행했던 병서가 상당히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판단된다. 특히 병서의 간행은 무반뿐만 아니라 하급군사들에게까지 실질적인 변화를 도모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파급효과는 지대했을 것이다. 더 나아가 국왕권의 강화와 실천을 추구했던 ‘국가재조론’에 대한 실질적인 방안으로서도 병서 간행작업은 정조대의 국왕권 강화를 위한 핵심적인 사업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재까지 정조의 사상에 대한 연구는 주로 문(文)적인 부분에 치우친 경향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규장각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다양한 ‘문예군주’로서의 정조의 모습에 대해 상당히 많은 연구 결과물들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정조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정조가 추구했던 개혁정치를 실질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무(武)적인 측면이 더 중요한 요소였음을 누구든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인 사도제자의 억울한 죽음과 왕이 된 후에도 끊임없이 목숨의 위협을 느껴야 했던 정조에게 그만의 독특한 ‘문무겸전론’ 은 새로운 조선을 꿈꿀 수 있게 만든 최고의 정치철학이었던 것이다. 국가를 운영하는 정치가들은 예나 지금이나 당대의 현실을 정확하게 짚어내야만 발전적인 대안을 만들어 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