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와 누드는 벗는다 또는 벗긴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동기가 다르다. 위안부는 타의에 의해 벗는데 반해 누드는 자의로 벗는다.
위안부를 소재로 한 이승연의 누드를 둘러싸고 설전이 한창이다. 궁지에 몰린 기획사는 “돈 벌 생각 때문에 시작한 일은 아니다”라고 변명하고 있다.
그러나 생존해 있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 132명과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한국여성단체연합, 나눔의 집 등 여성단체들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분개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는 오늘 다시 한번 일본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게 모욕과 수치심을 주는 분노를 금할 수 없다”며 “누드를 통해 한일관계를 재조명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라고 비난했다.
누드가 예술이냐 외설이냐는 차치하더라도, 위안부 할머니를 작품의 소재로 삼은 것은 잘못이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성노예는 반인륜적 야만행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참상을 연상시키거나 재현하는 것 자체가 부도덕한 짓이다.
일본군이 위안부를 데리고 다니기 시작한 것은 1918년 시베리아 출정 이후부터 였다. 당시 10개 사단 가운데 1개 사단의 장병이 성병에 걸리자, 성병 예방책으로 기상천외한 위안부제도를 생각해 낸 것이다.
1931년 조선총독부와 결탁한 일본의 매춘업자들이 조선 여성을 모집해 위안부로 부려 먹다가, 전쟁 막바지인 1944년 8월 23일 여자정신근로령(女子挺身勤勞令)을 공포, 12세 이상 40세 이하의 독신 여성 20만명을 성노예로 삼은 것이다. 단 한번도 용납될 수 없는 것이 치욕이다.
돈 벌이를 위해서라면 못할 짓이 없는 세상이라지만, 상술에도 정도(正道)는 있는 법이다. 위안부 할머니의 아픈 상처를 상품으로 할 수밖에 없을만큼 소재가 궁했는지 모르지만 이번 일은 시작부터가 실수였다. 필름 채 없애버린다해도 미안은 남을 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