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항
/이현호
낯선 계절을 항해하던 넋이 빈방에 닻을 내린다
마음이라는 이생의 풍토병을 앓으며
몇 번이고 난파하며, 너라는 이름의 태풍들을 헤쳐왔다
삶, 그것은 기껏해야 찻잔 속의 태풍
해적 깃발을 지느러미처럼 펄럭이며
배는 다시
폭풍우 속으로 나아간다, 뱃사람의 노래와 함께
생명보험회사는 무엇 때문에
불멸의 인간에게 사망보험금을 지급하는 것인가
※ 마지막 연은 허먼 멜빌의 ‘모비 딕’에서.
- 이현호 시집 ‘라이터 좀 빌립시다’
잠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을 때가 있다. ‘삶, 그것은 기껏해야 찻잔 속의 태풍’이라 위로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것은 몇 번이고 난파하며 너라는 이름의 태풍을 헤쳐온, 지친 심신을 위한 것이다. 우리는 정신없이 노를 젓는 동안 이생에 매달린 풍토병을 앓는다. 하지만 우리는 해적의 깃발을 지느러미처럼 펄럭이며 앞으로 나아가야한다. 내가 나를 추스르는 충전의 시간을 거쳐 다시 나아가야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불멸의 인간이다. 죽어도 죽지 못하는 항해다. 다시 한 번 뱃사람의 노래와 함께 나아가자. 생명보험회사는 무엇 때문에 사망보험금을 지급하는 것인가 묻는 저 반어법의 물음으로 어떤 난관도 뚫고 가보자. /서정임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