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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구 칼럼]익명성과 질환

 

주말에 시골읍내에 가면 가끔 5일장을 만나게 된다. 장터 모습은 어릴 적 같지는 않지만 여전히 호떡, 각종 튀김, 호미를 비롯한 간단한 농기구들, 그리고 여러 가지 색의 플라스틱 그릇들, 체육복, 채소, 심지어 푸줏간까지 노상으로 나온다. 한 바퀴 시찰하는데 한 시간이면 넉넉하다. 본 것 또 보고 그 다음 장날에도 똑같은 풍광과 똑같은 품목, 똑같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그 누구와도 눈인사조차 않고 눈 구경만 하고 장터를 빠져 나온다. 시골사람들의 활기차게 살아가는 모습과 집에서 기르거나 지역에서 채취한 온갖 것들이 한 자리에 모여 북새통을 이룬다. 그래도 이 안에는 터의 위계와 질서가 있고 엄연히 상도덕이 살아있다.

장터를 갈 때는 양복을 입고 가면 뭔가 어울리지 않을 것 같고 불편하기도 하니 집에서 편하게 걸치고 있던 체육복 차림에 봄날 햇빛 가릴 모자와 색안경을 끼고 장 안을 어슬렁거리게 된다. 초로에 색깔 있는 체육복에 칼라로 영어글씨가 새겨진 운동모자를 쓴 것은 봐주겠지만 그 차림에 색안경까지 썼으니 누가 봐도 참 가관이었을 것이다. 이 가관을 사실은 본인만 모르고 있다. 행인들의 눈길을 의식할 즈음 강남 오빠스타일이라서 바라보는 줄 천부당만부당한 착각도 한다. 과거 시골 장터를 가면 노인들은 의관을 가지런히 하고 장안을 다니셨다. 주막에서 막걸리를 마실 때도 자태를 흩트리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이제는 정결한 두루마기 차림의 풍경은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오빠 스타일 차림으로 장터를 나오는 노인들도 없다.

얼마 전, 지하철 1호선 서울역으로 가는 차 안에서 80세가량 되어 보이는 노인이 보라색 스킨 면바지에 짙은 청색 면 양복상의, 긴 부츠에 파란 개똥 모자를 쓰고 출입문에 양손으로 지탱하면서 운동을 하듯이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며 가는 광경을 보았다. 승객 모두 그 특이한 뒷모습에 처음에는 아이돌 흉내 내는 청소년으로 보았다가 노인임을 인식하고는 모두 기겁을 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 더 이상 아무도 그 노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젊어지고 싶어 어찌할 바를 모르는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노인같아 보여 추해 보였지만 잠시 즐거움을 주었다.

체질상 몸 형태에 큰 변이가 없어서 옷가게에 가면 젊은이들 취향의 옷을 구입하고는 한다. 언젠가 이 연세에는 저쪽 가게에 가셔야 적절한 옷을 구할 수 있다고 점원이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는데 몹시 섭섭한 마음을 내색 못하고 그 가게에 가보니 마음에 드는 옷을 찾기가 쉽지 않아 포기했다. 어깨가 넓고 팔 길이는 짧고 통자로 된 상의가 대부분이었다. 장년이상은 넉넉한 옷을 입어야 남들이 볼 때도 불편해 보이지 않고 입어도 편하다는 것이다. 오랜 기간 젊은이들 취향의 옷을 입어온 터라 그런 노털 같은 스타일의 옷이 마음에 들 리가 없기도 하지만, 옷 입는 것까지 남들을 의식하면서까지 입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드니 젊은이들 취향의 옷을 더 찾고 싶어졌다. 이 선을 넘어서면 지하철에서 본 그 보라색 노인과 다를 바 없다는 것도 안다.

시골장터에서 입었던 옷차림은 장터라는 장소성으로 용인될 수 있다고 할지라도, 폐쇄된 공간 안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마주칠 때 뭇 사람들이 멋지다고 칭찬해 주는 말에 착각하거나 속아서는 안된다. 그런 칭찬은 야유일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모든 물건은 놓여야 할 적절한 장소와 위치가 있으며 사람도 나이에 따라 입어야 할 옷의 적당한 형태와 색깔이 있다. 그뿐 아니라 나이에 적절한 행동과 말씨도 있다. 소위 상류층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상스러운 욕설을 일상 언어처럼 사용하고, 고급 외제 승용차를 타고 교통위반을 밥 먹듯 한다면 보기에 추한 것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노여움까지 사게 되는 것이다.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는 익명성을 무기로 삼아 특정 장소와 공간에서 함부로 떠들고 행동하는 것은 그 사람의 도덕성과 공공성에 대한 교육의 정도를 떠나 그것은 정신병이며 치료를 받아야 하는 질환이다.

언젠가 유시민 전 복지부장관이 국회에서 청바지 차림에 한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발언을 하는 바람에 다른 의원들과 국민들의 빈축을 산적이 있다. 이것은 권위적인 것에 대한 의도된 옷차림이었으니 예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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