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는 창덕궁 후원(上林)에서 아름다운 전경을 10곳을 뽑아 시를 남겼는데, 1경이 관풍각(觀豊閣)으로 관풍 춘경(觀豊春耕)의 시를 지었다.
비둘기 새끼 날개 퍼덕이며 어미 따라 운다.(乳鳩拂翅斑鳩鳴)/ 논(公田)에 물이 가득하니 비로소 논갈이가 시작하는구나(水滿公田始課耕)/ 역대 제왕들은 농사의 부지런함에 힘써왔으며(自是帝王勤稼穡)/ 보기당(寶?堂)에서 가을 풍년을 알렸네(寶?堂下告秋成)
농사는 국가의 기본이 되므로 광풍각을 첫 번째 경치로 뽑은 것으로 보이며 ‘관풍각의 봄갈이’의 제목으로 농사 풍경과 국왕들은 농사에 힘써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건물 이름은 ‘풍년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현재 남아있지는 않으나 ‘동궐도(1820년대 후반 제작)’에 의하면 창경궁의 북쪽이며 월근문 서쪽에 위치하고 건물은 누(樓)형식으로 하부에는 옥류천에서 내려온 개울이 지나고 있어 보기 드문 경관을 보여주고 있다.
권농장(內農圃)은 광풍각의 북쪽에는 있는데 개울의 동쪽에 6개 배미, 서쪽에 5개 배미로 총 11배미의 논이 보인다.
헌종연간에 제작된 ‘궁궐지’를 보면, “관풍각은 인조 25년(1647)에 지었는데 후원의 여러 못의 물이 그 아래로 흐르고, 북쪽에 논이 있고 앞에는 연못이 있다.”라고 적고 있어 ‘동궐도’의 내용과 다르지 않다.
여기서 특이하게 보이는 것이 관풍각 아래로 개울과 그 앞에 연못인데, 이런 방식은 농사를 권장하는 현장보다는 오히려 유희 공간과 어울려 보인다. 조선은 농사를 기본통치 이념으로 삼아 궁궐 내부에도 농경지를 조성하여 권농정책을 하게 된다. 세종시기의 경복궁 후원 향원지 근처의 농경지 조성을 시작으로 성종은 창경궁 후원, 인조는 경덕궁의 정전 앞뜰, 고종은 경복궁의 후원에 권농장을 조성하였다. 권농장에서 국왕의 역할은 직접 농사에 참가하기 보다는 근처에 머물면서 농사의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주 업무였을 것이다. 당시에는 현대와 달리 엄격한 신분의 구분이 있어 권농장이지만 국왕이 머무는 장소이므로 조경을 하게 되어 이런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관풍각 아래로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면서 부국한 나라를 꿈꾸고 농사의 중요성을 읊은 국왕은 정조 이외도 숙종, 영조, 순조 등이 있었고 정조가 세자시절인 16살에 이곳에 와서 풍년을 기원하고 글을 남긴 것은 그만큼 백성을 생각하고 미래의 성군이 될 기질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동궐도’를 통해 건축적인 면을 자세히 보면 광풍각이 개울에 직각으로 앉은 것이 아니라 마름모 방향으로 배치되어 남동쪽의 연못을 바라보게 되어 있다. 크기는 사방 1칸으로, 1층 바닥은 장초석을 두고 지면에서 떨어져 있다. 창호는 궁판이 있는 살문이 4짝이 한 칸을 채우고 있으며, 4면 모두 같은 형식으로 된 것으로 보인다. 지붕은 모임지붕으로 정상부에는 절병통이 있다. ‘동궐도’에는 권농장의 명칭은 미표기로 되어있으나 약 80년 후 제작된 ‘동궐도형’에는 배미가 동서 양쪽에 각각 5개씩 있는 모양이고 ‘답십야미(沓十夜味, 야미=배미)’라고 표기되어 있어 11배미가 10배미로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권농장의 운영은 고종은 경복궁으로 이전한 후에도 계속된다. 고종 30년(1893) 신무문 밖 후원(현 청와대 자리)에 농장을 만들어 전국 8도에서 가져온 종자로 농사를 지었으며 이곳을 ‘팔도배미’로 불렸다. 하지만 창덕궁과 경복궁의 권농장은 1907년 정미 조약으로 나라의 행정권이 일본에 넘어가면서 왕실 관련 행사들이 없어지고 권농장의 기능도 상실되면서 답십야미는 1907년 춘당지(春塘池) 공사로 없어지고 지금도 권농장의 흔적은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나마 경복궁의 권농장터인 청와대에서는 ‘팔도배미’ 옛터를 기념하는 표석을 2000년 6월에 세워 아쉬움을 달래고 있으나 허전함은 남아있다.
조선의 제왕들은 백성을 위하는 터전인 권농장은 궁궐의 화려함보다 더 의미가 있는 문화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