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와 쿠르베에 대하여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전혀 다른 시대에 살았고, 전혀 다른 동기와 방식으로 작업했던 두 거장의 삶은 예술과 권력의 관계의 극단적인 예를 보여준다.
미켈란젤로는 1508년 교황 율리우스 2세로부터 시스티나 성당의 천작 벽화를 완성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누워서 그림을 그려야 하는 작업이 만만치 않게 보였을 뿐더러, 그 넓은 천장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전혀 갈피를 잡지 못했던 미켈란젤로는 자신은 화가가 아니고 조각가라는 말까지 하면서 처음에는 고사를 했었다. 그러나 율리우스 2세의 뜻은 완강했고 교황의 권위가 막강했던 시절이었다. 갖은 협박에 못 이겨 미켈란젤로는 하는 수 없이 천장화 작업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그림을 구상하는 와중에도 도저히 작품을 해낼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에 도망을 치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미켈란젤로는 4년의 고된 작업을 감수했고 ‘천지창조’라는 위대한 작품을 완성했다.
아무리 교황의 권력이 막강했다 하더라도 그는 최고의 실력자였고 사랑받는 장인이었기 때문에 간혹 성질을 부릴 수 있었다. 벽화가 모두 완성되기까지 성당에 출입하지 않겠노라는 약속을 깨고 작업 중 교황이 방문하자 붓을 꺾고 성당 밖으로 나가버리기도 했고, 벽화의 지옥 부분에 평소 자신을 괴롭히던 주교의 얼굴을 흉측한 귀가 나고 중요한 신체 부분을 괴수에게 물리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그렸다.
반면 쿠르베의 반항심은 전면적인 것이었다. 그는 형이상학적인 아름다움을 쫓기 위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외면하거나 왜곡했던 당시의 화풍에 도전장을 내밀고 매우 현실적인 소재를 매우 현실적인 방식으로 그렸다. 전시회에서 작품을 관람하던 나폴레옹 3세가 쿠르베의 작품 속 여인의 펑퍼짐한 엉덩이에 충격을 받아 채찍으로 그림을 내리쳤다는 일화는 그의 작품이 당시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춰졌을 지를 보여준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인상파를 비롯한 19세기의 화가들은 시대의 반항아들이었고, 살롱전을 중심으로 하는 아카데미 화풍에 반기를 들고 자기만의 스타일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 3세가 쿠르베의 작품을 내리친 사건은 이들 예술가들이 더 이상 권력에 속박된 이들이 아니며 이들의 가공할만한 창조력의 근간에는 권력과 기존의 가치에 대한 저항이 깔려 있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미술사에서 ‘작가’라는 존재, 그리고 ‘작가정신’이 등장한 시기를 이즈음으로 여기고 있다.
4년 동안의 천장화 작업이 얼마나 고됐던지 미켈란젤로는 작업 내내 피부병에 시달려야 했고, 시력을 많이 상실하였으며, 골격도 엉망이 되어 작업이 끝난 후에도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웠다고 한다. 그러한 고통을 감내한 장인의 심연은 깊은 것이어서, 정말로 교회의 억압에 못 이겨 작품을 완성한 것인지 신에 대한 경외심으로 그럴 수 있었던 것인지는 쉽게 판단하기가 어렵다. 작품이 완성된 후에도 교회는 예수의 형태가 신비스럽지 않다, 불경한 신체 부위를 천으로 가려야 한다는 둥 여러 트집을 잡으며 미켈란젤로와 그의 사후에는 제자에게까지 작품의 수정을 요구했다. 미켈란젤로가 비록 교회의 후원에 기대었던 화가였다고는 해도 교회의 간섭과 요구에 화를 냈던 것을 보면 작가로서 침해받지 않을 권리를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 분명하다. 훗날 관객들은 장인들과 지식인을 억압했던 교회의 행실을 부당하게 여기면서도 오랜 인고 끝에 탄생한 대작 앞에서는 끝내 감동을 받고 만다.
쿠르베는 작품의 영역에서도, 실제 삶에서도 현실과의 괴리를 용납하지 않은 작가였다. 인민들의 교된 삶을 작품의 소재로 삼았고, 정치적으로도 혁명의 노선을 걸으면서 파리 코뮌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후에 그는 국가로부터 나폴레옹 석주를 파기했다는 죄목으로 감금되었다가 엄청난 액수의 벌금을 맞고 풀려났지만 이를 갚을 길이 없어 망명생활로 생을 마감해야했다.
현대 작가들 중에서도 수세기 전에 생존했던 작가들의 고뇌를 여전히 지니고 있는 이들이 있다. 사회의 여러 병폐와 모순들에 대하여 발언을 할 필요를 느끼면서도 재정적인 지원에 힘입어 작업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현실에 처한다. 작가를 작가이도록 하는 내면의 그 무엇은 한 인간의 경제력과 신체적 건강, 심리적 안정감을 파먹으며 작가의 삶을 고되게 내몰기도 한다. 아직 우리 사회가 작가에 대한, 더 나아가 인간에 대한 존엄과 복지를 온전히 실현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