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모자가 달린다. 폭우가 쏟아진다고 하더니 하늘을 보니 비는 멀찍이 달아났다. 널어놓은 솜이불이 쨍쨍한 햇볕을 흠뻑 빨아먹고 팽팽하게 부풀었다. 날씨가 더워지자 모두들 지치고 늘어져 움직이는 것 자체를 귀찮아하는데 자전거를 탄 베트남댁이 제철을 만났다. 사시사철 뒤로 묶은 긴 생머리에 벙거지 모자를 쓰고 자전거로 폐지를 비롯한 고물을 모아 나른다. 벌써 너 댓살 된 아들도 있어 우리말을 제법 할 때가 되었지만 누구와 말을 주고받는 모습을 본 일이 없다.
몹시도 춥던 겨울날 자전거로 운반하기에 많은 박스를 우리 집 근처 전봇대 옆에 모아 두고 다시 올 요량으로 떠났다. 그러나 그녀가 돌아오자 박스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평소 유모차를 밀고 운동을 하시는 할머니가 집에 모아둔 폐지까지 합해 다른 사람에게 주셨다. 인정 많으신 할머니의 선행이 그만 베트남댁을 안타깝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추운 길을 자전거를 타고 되짚어 왔건만 없어진 박스에 대해 물어볼 생각도 못하고 돌아섰다. 더운 나라에서 살던 베트남댁에게 있어 겨울은 그 자체로 형벌이었다. 시린 손을 입으로 불기도 하고 햇볕이 있는 쪽에서 고물을 정리하며 추위에 빨갛게 된 얼굴에 모자를 눌러쓰고 자전거를 타고 달렸다. 나중에 내막을 아시고 딱하게 여긴 할머니께서 이따금씩 고물을 모아 주시곤 하셨다.
다문화 가정으로 불리는 여성들을 위해 정부나 자치단체에서는 나름의 뒷받침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리고 주위에서도 낯선 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마음으로 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평소 가까이 지내는 가정에도 베트남 출신 며느리를 보았는데 나이도 어린데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이를 가져 입덧으로 고생한다며 시어머니가 입에 맞는 주전부리도 사 나르고 어울릴만한 옷도 사주고 마음 붙일 수 있게 보살피는 모습이 보기에도 좋았다. 그 외에도 필리핀이나 우즈베키스탄 같은 다른 나라에서 온 새댁들이 우리나라 가정에 일원으로 잘 적응을 하고 있어 다행스럽다. 농가에서 이웃과 어울려 품앗이도 하고 취업을 해서 밝게 사는 모습을 보면 먼 나라에서 어떻게 왔는지 모르지만 귀화식물이 피운 들꽃처럼 애틋하기까지 하다.
어느 날 얼핏 보기에도 지능이 좀 떨어지는 듯한 남자가 유모차에 노모를 태우고 지나갔다. 누군가 아는 체를 하며 몇 마디 인사를 건넨다. 어머니와 짜장면 먹고 간다는 말이 마음에 꽂힌다. 조금 전 고물을 잔뜩 싣고 가는 자전거가 몇 번이나 눈앞을 스친다. 계절이 수 없이 바뀌어도 베트남댁은 여전히 고물을 주워 팔고 지금도 혼자다. 그 집에서 나오는 소문이 그녀의 고물더미 보다 커진다. 몰인정한 시어머니와 무심한 남편에 관한 온갖 소문이 홀씨처럼 날렸다. 그러다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했지만 쓰라린 세월에도 아이는 자라고 얼굴을 알아보고 고물을 모아주는 곳도 늘었다. 돈 벌면 부웅 하고 간다고 했다던 말은 어디로 갔는지 장마가 멎어 뙤약볕이 쏟아지는 거리를 베트남댁의 모자가 시원하게 달린다. 달맞이꽃처럼, 개망초처럼 화려하지 않아도 정겨운 들꽃처럼 이 땅에서 잘 살아가기만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