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길
/강인한
율리야, 너에게 주려고
동화책을 샀지.
양심을 두 개씩 달고 살아가는 슬픈 사람들이
술에 취해서
이 겨울도 비척이는 밤
밀감이며 바나나 그득한 과일상회랑
신나게 요란한 백화점, 제과점을 지나
율리야, 너에게 주려고
동화책 한 권을 샀지.
서둘러서 돌아가는 사람들 틈에 끼어
구십 원짜리 시내버스를 타고
차창 밖 까맣게 젖어서 흐르는
네모난 밤을 내다보았지.
아빠 아빠,
삼십만 원도 안 되는 선생 노릇을
아빠는 뭐하려고 십오 년씩이나 해?
식구들 몰래 눈물을 지우던
딸아, 내 어린 딸아,
쉬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매운바람 속
아빠가 들고 가는 이 작은 선물이
하루만이라도 곱다란 기쁨이기를.
추운 사람들이 내뿜는 하얀 입김
유리창 밖 웅크린 풍경 위에 가만가만 덮이고
소주에 취해서
길고 긴 겨울은 술병처럼 흔들리지만
율리야, 너에게 주려고
아빠는 동화책 한 권을 샀지.
- 강인한 대표시 100선‘신들의 놀이터’, 책만드는집
율리는 시인의 따님이다. 열한 살쯤의 소녀였으리라. 나아가 율리는 가난한 아버지를 둔 모든 딸의 이름이다. 마음만 먹으면 가난 따위 뚝딱 물리칠 위대한 아버지였던, 철없는 말의 위력을 까맣게 모를 철부지 딸, 그래서 아버지 어깨는 조금 더 쳐졌을지 모를. 그러나 내 어린 딸 율리야, 동화책 한 권이 품고 있는 저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라. 그리하여 아버지보다 훌륭한 딸이 되어라. 바로 며칠 전 그 율리를 만났다. 중년의 전문직 여성이었다. 이제 연로하신 부모님의 보호자가 된 자식, 동화책이 키워낸 큰 나무, 그 나무에 기댄 부모의 편안하고 흐뭇한 표정이 내게 오랫동안 머물렀다. /이미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