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건강하셨는지요?”
인사 올리고 마주 앉자
“아이구, 내사마 지금이 죽기에 딱 좋은 때인 것 같어. 산다는 게 말이어, 사람들하고 소통도 하고 내 몸도 잘 건사해야 사는 것이제. 귀도 잘 안 들리고 해서 동네 마실도 못나가고 방안에 처박혀서 방구들신세만 지는 건, 사는 게 아니여.”
“무슨 말씀이세요? 이렇게 건강하신걸요. 말씀을 이렇게 잘하시는데요.”
“사실 내가 아직까지도 매일 지팡이 없이 몇 시간씩은 들판을 휘젓는데 어제도 저~거 산밭에 갔다가 땅벌을 건드려서………”
아흔을 바라보시는 시삼촌의 묵은 말씀은 30분이 지나도 멈출 생각이 전혀 없으시다. 묵혀둔 말의 타작이 시작된 것이다. 말씀을 시작하시면서 점점 더 화색이 도는 낯빛, 시간이 길어질수록 목소리가 높아지시니 환하게 웃으며 그 앞에 마주앉아 맞장구를 놓치지 않는 방청객이 될 수밖에 없다.
누군가 내 말을 들어준다는 건 그렇게 신나는 일이다. 마음과 머리에서 만들어지고 각색된 나의 이야기를 한 번도 풀어내지 못하고 가슴 속에 꽁꽁 묶어둔다는 건 정말 슬픈 일이다.
어쩌면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말을 하기 위해서 생각을 하고 일을 도모하는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내 생각을 말하고 나의 사연을, 나의 아픔을 토하듯 말을 함으로써 삶의 힘을 얻고 묵은 스트레스를 풀어내기도 한다. 가끔 가슴 터질 듯 답답한 일이 있을 때 누군가에게 화끈하게 속내를 털어놓고 나면 묵은 체증이 내려가듯 속이 시원할 때가 있다. 결국 사람들은 충분히 숙성된 말의 건강한 타작처럼, 혼자가 아닌 어울려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살아갈 때가 가장 건강한 모습이 아닐까 싶다.
추석 명절을 보내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조용히 되짚어 보았다. 올 추석에 거두어들인 숱한 ‘말’의 타작, 그 수확들을 말이다. 모처럼 만난 사촌들 간의 안부인사에도 처음엔 약간의 어색함이 있지만 곧 풋풋한 정이 묻어나는 눈빛이 동행하니 그 또한 영양가 있는 말이었다. 차 한 잔 앞에 놓고 점점 더 높아지는 서로의 목소리를 확인하며 숨넘어가게 웃어댔던 언니, 조카들, 엄마와의 말의 파티. 그 말의 파티야말로 추억이 폭죽처럼 쏟아지는 순간들이었다. 남자들끼리 드문드문 나누는 대화 속에서도 지나온 집안의 내력들을 되짚어볼 수 있는 알곡들이 제법 있었다. 더하여 한 분 한 분 만나 뵌 어른들의 말에서 묻어나는 삶의 진정성이야말로 고리타분하다는 느낌만으로 묻어버리기엔 소중한 말들이 참, 많았다.
누렇게 익은 벼들 사이 밉살맞게 불쑥불쑥 솟아 있는 피처럼 말에도 쭉정이가 있게 마련이다. 언뜻 지나치며 하는 다이어트, 취직, 결혼, 대학 등등의 약점을 쿡쿡 찔러대는 말이라면 듣는 이에게나 관계회복에서나 결코 알곡이 될 수가 없다. 말의 쭉정이는 간혹 폭탄이 되어 분위기를 싸하게 초토화시키기도 하고 마침내 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기에 매번 조심한다지만 번번이 당할 때가 있다. 벼논에 솟은 피 말끔히 뽑아내고 오롯이 익은 곡식 정성껏 거둬들이듯 숱한 말 속에 섞여있게 마련인 말의 쭉정이, 그 폭탄도 적절히 골라낼 수만 있다면 해마다 명절 끝, 말의 타작은 풍년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음 명절에도 어르신들과 모처럼 만나는 가족 친지들의 묵혀둔 풍성한 말의 타작을 대비해 묵묵히 말의 쭉정이 걸러내는 연습을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