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울 줄 아는 짐승’으로 그린 시구에 깊이 끌린 적이 있다. 얼마 전 타계한 백수(白水) 정완영 시인의 표현인데, 여느 시구보다 여운이 길었다. 사람은 대부분 울 줄 아는 짐승임에 틀림없으니 새로울 것 없는 표현이라고 할 수도 있다. 보통 짐승들도 울 뿐만 아니라 오히려 웃음 보기가 더 어렵다는 점에서는 더욱 그렇다.
사실 우리는 ‘새가 운다, 귀뚜라미가 운다’고 예사로 말해왔듯 ‘노래한다’보다 ‘운다’가 몸에 더 배어 있는 표현이다. 그렇게 보면 ‘울 줄 아는 짐승’에 감동하는 게 과잉으로 비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왜 놀라운 수사처럼 끌렸는지 짚어보면 고구마줄기처럼 생각을 줄줄이 매달고 나온 함축 때문이다. 운다는 행위 자체를 자기감정에 충실한 몸의 즉각적 반응으로 보면 울음은 일종의 무장해제라고 할 수 있다. 현대사회의 필수품처럼 되어버린 가면 따위를 벗어내는 눈물의 분출은 카타르시스 효과도 크다. ‘남자는 일생 세 번만 울어야 한다’느니 자기 검열을 가해온 사회적 억압 등을 생각하면 그런 힘은 더욱 크게 느껴진다.
그런 본연의 기능을 넘어 짚이는 것은 울 줄 아는 마음, 그 움직임의 바탕이다. 운다는 것은 자신에게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어떤 대상에의 공감에 따른 마음의 작용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무엇보다 필수적인 게 공감의 능력일 것이다. 아프고 슬픈 사람과 같은 체감온도와 감각으로 느낀다는 것, 그래서 그 감정의 움직임으로 우는 행위는 곧 공감의 확장이다. 그러니 울 줄 아는 사람이어야 공감의 능력도 큰 것은 물론 그게 부족하면 우러나올 울음도 당연히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울 줄 아는 마음이야말로 바람 앞에서 풀잎이며 나뭇잎이 몸을 떨며 움직이듯 자연스럽게 맞아들이는 열린 감각으로서의 감응 능력이 아닐 수 없다.
공감에도 개인차가 있겠지만 남녀로 갈라 볼 때는 더 큰 차이를 드러낸다. 이미 알려진 예지만 남자와 여자의 화법 차이도 공감의 유무에서 극명하게 나뉜다고 한다. 남자는 문제 해결 중심의 화법을 쓰는 데 반해 여자는 공감을 가장 중시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화법이 다르니 마음먹고 대화를 하다가도 다툼으로 비화되기 다반사다. 공감하면서 자기 편들어주기를 바라는 여자에게 문제 해결이나 가르치려는 남자는 공감의 능력 부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렇게 같이 울 줄 아는 공감의 힘을 낮춰보다가는 결국 어둠 속에서 혼자 우는 입장에 처하게 된다. 공감 부족이 더 불행한 것은 사람살이만 아니라 자연이나 예술에 대한 공감의 감각도 떨어져서 갈수록 사는 즐거움을 잃을 수 있다는 점이다.
울 줄 아는 마음에 또 붙여볼 수 있는 능력은 연민이다. 일찍이 우물가로 아기가 기어가는 것을 보면 빠질까 봐 얼른 안아 올리는 마음을 ‘측은지심’이라 했듯(맹자), 측은히 여기는 마음 또한 울 줄 아는 짐승의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이런 연민이야말로 세계를 구원할 인류의 보편적 공감이요 휴머니즘 아닐까. 공감은 그래서 어떤 언어나 행위에도 앞서는 마음의 움직임으로 점점 중요한 능력으로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공감의 중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토론 강연장인 테드(TED)에서도 확인된다. 어떤 유명 연설의 기본도 계몽보다 공감을 앞에 둔다는 것이다. 일종의 맨스플레인(Mansplain)처럼 어디서나 가르치려 드는 태도나 말투는 구시대적 화법으로 퇴출 중인가 보다.
‘울 줄 아는 짐승’의 시인은 백수(白壽)를 앞두고 눈을 감았다. 시인의 붓 끝에 와서 수척한 물빛이며 그리움의 깊이를 얻은 가을 초입에 떠났으니 어디서 또 울음의 심급을 매기려나. 우리네 산하며 고샅을 시조의 유장한 가락으로 기막히게 울고 울렸던 정완영 시인. 그런 울음이자 울림인 절창들처럼 가을하늘도 푸르른 공명을 높이 펼치는 때다. ‘자네 소리하게, 내 북을 치지’ 수원 글판 시구처럼 울 줄도 울릴 줄도 잘 아는 가을도 한가운데. 공감지수 높이는 시와 더불어 속곳까지 물드는 단풍 따라 깊이 한번 울어보는 것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