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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희의 미술이야기]전쟁 중에 그려진 작품들이 주는 생경함

 

자그마한 캔버스는 바다와 방죽, 집, 하늘의 여러 층으로 정연하게 나뉘어져 있다. 하다와 하늘은 짙푸르고 방죽은 작은 다이아몬드 모양들로 촘촘하게 쪼개져 있으며, 돌조각들은 여린 하늘빛과 회색빛을 오고가며 색깔을 띠고 있다. 캔버스 가운데를 가로질러 그려진 집은 샛노란 색이다. 열린 창문들 안으로 꿈꾸는 듯 한 사람들과 꿈속인 것 같은 아득한 배경이 보이기도 한다. 이는 51년에 그려진 김환기의 ‘판자집’이라는 작품이다. 한국 전쟁 통에 대부분 소실되어 남아있지 않는 몇 안 되는 그 시절의 작품 중 하나이다.

한묵의 53년 작 ‘설경’은 부산 피난촌의 모습을 담고 있다. 지붕이 눈으로 덮인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언덕배기 위에 모여 있으며, 형상들은 고요하게 단순화되었다. 1·4후퇴 시절 부산의 광복동 피난촌에는 서울에서 온 미술작가들이 공동체를 형성하고 지내며 어렵게 활동을 이어갔다. 피난민으로서의 삶은 고달팠고 작품 재료를 구하는 것도 어려웠지만 예술가들은 서로를 위로하며 아주 작은 낭만을 나누었고 ‘대한미술협회’전에 출품하기도 한다.

허나 이들 작품이 지닌 고요함은 후대인으로서는 전쟁 중에 그려진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의아함을 자아낸다. 이때 완성된 작품들 중 미술학도들에게 비교적 잘 알려진 것들은 고통과 상흔 보다는 평온함과 고요함을 말하는 작품들이 많기 때문이다. 극한의 시절 예술가들이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활동했으며 어떤 심정으로 작품 활동을 했는지 알고 싶은 게 많지만 근거자료가 매우 희박한 실정이다. 우리의 역사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스스로 방향을 설정하고픈 젊은 작가들에게 커다란 공백과 분열증을 안겨다 준다.

그런 의미에서 2014년 출간된 정준모의 ‘한국미술, 전쟁을 그리다’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해방 후 정치적인 현실과 맞물려 있는 당시 예술가들의 크고 작은 활동들과 이들의 이동경로를 소상하게 모아놓았다. 세간에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았던 소비에트 영향으로 그려진 작품들, 남한과 북한의 정치이데올로기 선전용 포스터, 작가들이 종군화가 시절에 그린 작품 등의 도판들도 많이 실려 있다.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했었던 이쾌대, 변월룡 전 역시 우리 세대에게 우리 근대미술의 잃어버린 조각들을 일부 찾아주었다. 여러 매체를 통해 보다 다양한 그 시절의 작품을 대할 수 있게 된 건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이들 역시 생소하긴 마찬가지이다.

극한 대립의 역사 속에서 예술가들은 정치에 부역하며 ‘뜨거움’을 강요받곤 했고, 원치 않는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으며, 원치 않은 선택을 강요받기도 했다. 물론 스스로의 의지로 뜨거움을 가졌던 예술가들도 있지만 월북 작가들의 작품은 휴전선 이남의 역사에서 꽤 오랫동안 금기시되었으며 그건 북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뜨거움이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무고한 이들이나 해치고 먼지만 일으키다가 결국 사그라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만약 내가 그 시절 태어나 진정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전쟁의 아픔을 그렸다면 피카소와 같은 표현을 할 수 있었을까. 아니 모든 것에 환멸을 느끼고 나 역시 고요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내가 지금이라도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글을 쓴다면 세상에 보탬에 되는 영향력을 손에 쥘 수 있는 것일까. 뜨거움을 가진다면 가능한 일일까.

우선 기억상실증부터 치료를 받아야할 것 같다. 기억부재증이라 해야 맞는 표현일까. 우리 세대는 이 땅에서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들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한다. 다소 먼 이야기이지만 신은 이스라엘 민족을 독립시킨 후 40년간 광야를 헤매게 하다가 가나안 땅으로 입성하기 전에 신신당부한다. 40년간 광야를 헤맨 역사,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신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뼛속에 새기고 자손대대 이를 상기시키라고 말이다. 나는 이 부분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스스로 왜곡되지 않은 올바른 역사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 한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우리의 미술사에도 잃어버린 시간들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전쟁 중에 그려졌다는 여러 유형의 작품들이 우리들에게 이처럼 생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들에게 잃어버린 시간들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좀 더 견고한 근대 미술의 조형언어가 우리 손에 들려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더라면 작가들은 살아남기에 보다 덜 급급해 하며 보다 본질적인 것에 집중하며 작업할 수도 있었을까…. 우리들은 지금 너무 많은 것들을 타인의 손에 맡겨두며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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