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벌써 취하기 시작했다. 서서히 달아오르다 몸 구석구석에서 땀이 나기 시작하면 나름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마침내 무장해제의 시간이 이어진다. 음악은 결코 술렁거리지 않게 장르가 따로 정해진 건 아니지만 그날의 대화 주제에 따라 가끔은 클래식, 뉴에이지, 또는 재즈로 시작하다 분위기에 따라 샹송이 불쑥 선정되기도 한다. 한 번 시작하면 두 시간 이상씩 이어질 수도 있는 술이 아닌 차에 취하는 이 시간을 나는 참 좋아한다.
“이 가을에 어울리는 국화차? 편안한 잠으로 이어지는 연잎차?”
“아니지, 차에 목말랐던 아들을 위한 묵직한 실론티?”
“아이, 생선 먹었는데? 가벼운 설록차?”
응석받이 막내의 생각까지 의견은 다양하다. 하지만 결국엔 절충된 차 재료를 선정하고 옹기종기 한 자리에 마주 앉았다 자연스럽게 늘 그랬던 것처럼. 일주일 만에 돌아온 아들아이는 이 시간이 너무 그리웠다고 마음껏 차 마시는 시간을 누리고 싶다고 한다.
온 가족이 함께 차를 마시는 시간. 때로는 티격태격 진지한 대화가 오고가고, 때로는 함께 한 지난 추억들에 대한 그리움이 다식이 되기도 한다. 십여 년 전 언젠가 명상과 생활 다도를 배우러 다니면서 서서히 시작된 문화. 자연스럽게 스며든 그 문화가 우리 가족의 중심에 자리 잡고 서로의 생각들을 나누면서 조금씩 갈등을 해소하고 이해해가는 시간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 같다.
시끌벅적한 식당에서 지글지글 고기를 구워내며 나누는 환한 미소, 먹거리를 앞에 두고 가족이 마주앉아 환하게 웃을 수 있다는 건 더없이 행복한 시간일 것이다. 사람에 따라 술 한 잔 더해지면 그 또한 금상첨화. 하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 나는 늘 허전했다. 와글거리는 사람들 속에서 서로의 목소리가 온전히 전해지지 않고 짧게 끝나버리는 아쉬움. 그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시작된 차 마시는 시간이 처음엔 후식을 먹는 시간처럼 느껴졌는데 이제는 차 마시는 시간을 위해 식사를 하는 격이 되고 말았으니 어쩌면 주객이 전도된 게 아닐까 싶다.
거실 한 쪽에 자리 잡은 나의 보물창고 속 보물들은 결코 비싼 것들이 아니다. 감국, 똘감잎, 뽕잎 등과 같은 자연 채취가 가능한 야생차에서부터 흔히 마트에서 구할 수 있는 몇 가지 티백 차, 큰 마음먹고 여행지 등에서 구한 귀한 차 몇 가지 정도. 우리 집을 방문하는 누구에게나 이 보물창고는 오픈되어 있다. 정갈하게 정좌를 하고 예의를 갖추어 차를 마주해야 한다고 배웠지만 나는 차 마시는 형식에 결코 제한을 두지 않는다. 차 마시는 시간 또한 일상의 생활이므로 일상의 생활이 가장 자연스럽고 편안할 때 그 시간을 아끼고 더 자주 함께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창 밖, 아파트 화단에 국화 향 어김없이 번지기 시작했다. 잇몸 가득 드러낸 아가의 함박웃음 같은 빨갛게 익은 꽃잎들의 저 생글거리는 미소. 매년 사들인 국화 화분, 꽃 지고 쓸쓸한 모습이 싫어 화단에 옹기종기 벗하라 내 놓았더니 잊지 않고 꽃 피워 파티를 열 줄 안다. 저 보라색, 노란색, 빨간 소국들의 옹알이, 그 옹알이 몇 송이 집 안에 들여놓으니 그것으로 가을은 넘치는 행복이다. 저 가을 색깔에 취하고, 옹알이에, 행복에 취한 오늘 저녁엔 하늘에 달 띄우고 감국차 몇 잔까지 더하여 취하는 매력에 흠뻑 빠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