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당에서
/이규배
바람 부는 강변에 은행잎 날리고
내일 아침에는 서릿발 칠까
찬 하늘은 눈이 부셔, 눈이 부셔
질금질금 눈물 흐른다
나무야 은행나무야
너도 여름 내내 울었을 게다
많은 날들을 울어
너 지금 눈부시게 흩날리고 있으니
강물이 꽝꽝 어는 아침
춥다고 몸 떨지 마라
눈 내리는 어스름 저녁
철새 떼 빛살무리로 솟아오르면
강변에는 흰 꽃 부시리니 흰꽃 부시리니
저 찬바람 속으로 가라
가라
살아 있는 날들의 순결을 두고
나무야 은행나무야
- 이규배 제1시집 ‘투명한 슬픔’ / 1993·푸른숲
시대의 혼돈이 모래시계처럼 역주행하고 있는 최근 어느 날 문득 꺼내든 이규배 시인의 첫시집에는 1990년대 청년 시인이 노래한 시대의 슬픔이 흥건히 고여있었다. 남사당에서의 ‘남사당’은 청년시절 들렀을 어느 주막. 그 곳에서 각혈처럼 토해 낸 시편들을 읽으며 그동안 ‘생활’이라는 이름으로 한 곳에만 머물러 제 잎새만 푸르게 적실 뿐 역사를 한 발짝도 진보시키지 못한 부끄러움이 돋아났다. 여름 내내 울어 마침내 가을을 눈부시게 하리라 생각했지만 모든 황금색들은 낙엽처럼 떨어지고, 찬바람에 묻어오는 흰 눈만이 꽃처럼 ‘지천명(知天命)’의 얼굴에 떨어지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서릿발 치는 시대에 안락한 봄볕에 머물지 않고 찬바람 속으로 가기를 노래했다. 시인의 노래는 지금도 시(詩)를 창(槍)으로, 방패로 시대의 찬바람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 ‘살아있는 날들의 순결’을 두고 지금도 우리의 방황은 계속되고 있다는 ‘투명한 슬픔’이 나목(裸木)처럼 을씨년스럽게 다가오는 25년 전의 한 젊은 시인의 노래다.
/김윤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