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독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묵독에 익숙해진 현대인은 낭독 자체를 잃었다. 문자를 눈으로만 읽는 게 당연해져 입으로 읽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산 것이다. 그런데 낭독을 해보면 소리 속에서 살아나는 글자의 청각적 즐거움을 새롭게 느낄 수 있다. 시가 지닌 본연의 노래성을 불러내 밝혀주고 들려주는 것이다.
낭독의 힘을 다시 본 것은 시민들의 시낭송 덕분이다. 시에서는 낭송이 늘 함께였고 독자와의 만남으로 이어졌으니 새로울 게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일반 시민들의 낭송 시간은 잊었던 낭독의 맛과 재미를 일깨웠다. 자신이 고심해 고른 시를 들고 나와 조금씩 떨며 낭독하는 모습 자체도 좋았지만, 눈으로 읽은 시를 귀로 다시 들려주는 효과가 컸던 때문이다. 시인들의 낭송보다 더 친근하게 몰입되었다는 청중은 낭독에 서린 추억을 돌아보며 뒷이야기로 시를 더 풍성하게 만들기도 했다.
새삼스럽지만 낭독은 소리 내어 읽기의 효과를 환기한다. 소리는 글의 이미지나 정서를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힘을 지닌다. 낭송을 ‘한 사람에 의해 음악적으로 표현되는 이야기’로 정의한 국어국문학자료사전에 따르면 낭송은 표현력도 길러줄 수 있다. ‘장식적인 음성표현, 곧 음절(音節)을 길게 끄는 일이나 말에 절주(節奏)가 곁든 표현 형식’으로 낭송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리 내어 글을 읽는 음독(音讀)의 하나’인 낭독에 모든 음독이 포함되니 둘을 굳이 가를 필요는 없겠다. 세간에서 외는 것을 낭송, 읽는 것을 낭독이라 구분하는 것과 상관없이 소리 내어 읽기란 다 낭독에 속하는 것이다.
요즘 재발견한 낭독의 힘은 수장고의 유물을 꺼내 완상하는 느낌마저 준다(‘낭독의 발견’은 몇 년 전 K방송국 프로그램 제목으로 시작한 후 비슷한 패러디도 나온 만큼 반향이 컸다). 우리네 일상에서 멀어진 낭독의 소환이 묵독 저 너머에 묻어 두었던 소리의 존재와 가치를 닦아 빛내주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즐긴 말놀이노래나 소리 내어 외운 시는 마치 입에 붙어 있었던 것처럼 지금도 술술 나오며 낭독의 효과를 보여준다. 묵독보다 낭독이 기억 저장에도 더 유리한 것이다. 물론 암기력 좋은 시절의 힘도 있겠지만 눈과 입이 함께한 소리의 기억을 더 확실하게 저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현대시는 낭송을 통해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어려운 작품이 많아 낭독용으로는 시를 더 골라야 한다. 현대미학을 이루는 요소 중의 하나인 복합화로 시가 복잡해지거나 길어지면서 낭송으로는 전달하기 힘든 구조적 특징이 늘었기 때문이다. 옥타비오 파스(Octavio Paz Lozano)가 말했듯, 현대시는 점점 고개를 숙여가며 묵독으로 거듭 새겨 읽을 수밖에 없도록 시적 기법이며 표현이 다양해진 것이다. 그럼에도 “시는 독창적이며 유일한 것이지만 독서와 음송을 통한 소통이기도 하다. 시인은 시를 창조하고 민중들은 음송을 통해 시를 재창조하는 것”이라는 그의 지적처럼 낭독은 이해와 공감을 넓혀준다. 독자에게 가서 완성된다는 시의 또 다른 면을 소통으로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낭독은 출간 사인회처럼 저자와 함께하는 낭독회로도 늘어나는 추세다. 시만 아니라 소설도 낭독으로 독자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만남을 공유하고 심화하는 것이다. 낭독의 확산 같은 그런 변화의 한 축에 있는 ‘시낭송가’의 활동이 늘며 관련 단체도 많아지고 있다. 낭송의 틀을 만들어 강좌를 열고 나아가 낭송대회 등으로 낭송가로서의 등단 같은 절차도 두고 있다. 과장 심한 낭송가의 경우 ‘닭살 돋는다’는 시인들과 달리 기업체에서는 이들을 초청해 시낭송 강좌를 갖기도 한다. 낭송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나아가 시가 지닌 위안과 치유의 힘에 따른 정서 순화도 가능하기 때문이겠다.
낭독의 재발견은 소리의 소환이기도 하다. 소리 내어 읽기는 바쁜 삶에서 미뤄둔 감성이나 상상력 충전에 좋다. 대인 관계에 서정적 물기와 온기를 더할 수도 있다. 낭독으로 시를 즐기며 인문적 교양을 나누다 보면 지금처럼 어이없는 세상이 주는 상처에 위로도 받을 수 있다. 나아가 슬픔을 견디는 힘과 바른 실현의 길을 찾는 데도 좋은 거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