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어둠과 고요 속에서 사물은 스스로 제 모습을 갖추곤 한다. 한 덩이의 바위 안에서 여인이 깨어나고 있다. 환하게 드러난 여인의 등은 구불구불 흐르고 있고 조명을 받아 음영이 드리어진 굴곡진 면들은 여린 피부 안에서 등골이 꿈틀거리고 있는 여인의 사실적인 모습을 포착하다가도, 이내 매끈하고 단단한 돌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저명한 수많은 조각가들이 그들의 손을 타기 전부터 이미 돌은 어떠한 형태를 담고 있었다고 말했다. 오귀스트 로댕의 ‘디나이드’는 이들의 증언을 뒷받침 해주고 있는 것 마냥 자연과 예술의 사이를 수시로 드나들고 있다.
로댕은 그전까지 사람들이 생각했던 조각의 개념을 바꾸었던 예술가였다. 당시 회화분야에서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아카데미즘과 살롱전에 도전하며 혁신을 일으키고 있었다면, 조각에서는 로댕이 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좌대를 깎다 만 형태로 그냥 놔두는 것, 머리나 팔다리가 생략된 토르소만을 제작하는 것, 신체가 여러 마디로 분절된 것 마냥 과장되거나 기형적으로 묘사하는 기법은 로댕 이전에는 없던 것들이다. 완전하고 매끄러운 형태의 기념비적인 조각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낯선 것일 수밖에 없었다.
완숙기의 작품으로는 ‘발자크’ 상이 단연 인상적이다. 인체의 세부적인 특징들은 모두 흘러 녹아버렸고 묵직한 망토에 둘러싸인 한 예술가의 개성만이 표상되었다. 이목구비 역시 흉측하게 뭉개졌고 얼굴선도 무너졌다. 프랑스의 사실주의 작가 발자크를 기념하기 위해 로댕에게 이 작품을 의뢰했던 프랑스작가협회는 발자크의 충격적인 모습에 작품을 거부해 버린다. 그리하여 6년에 걸쳐 발자크와 닮은 여러 모델들을 고용하고 수차례의 두상과 누드를 거쳐 완성된 이 작품은 한동안 방치되어야만 했다. 이즈음 로댕은 자주 작품 의뢰자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로댕은 젊은 시절 살롱전에서 빈번히 낙방했으며, 특히 첫 출품작 ‘코가 부러진 남자’의 흉측하고 이글어진 노인의 두상은 관객들에게 빈축을 샀다. 많은 예술가들이 그러했듯이 그는 낮에는 생계를 위한 작업을 했고, 한밤중에야 예술성을 갈고 닦았다. 그를 지지하는 이는 적었지만 예술과 작업에 대한 굳은 신념, 위대함의 추구, 그리고 성실함은 로댕을 예술가로서 이끌었다. 로댕의 작품에서는 신화 속의 이상적인 인물들은 등장하지 않고 대신 현존하는 인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드러나지만 나는 로댕의 작품을 접할 때마다 그 주변에 늘 신성이 감돌고 있다고 생각된다. 다행이도 그는 40대가 되어 조금씩 사람들의 지지를 얻기 시작했으며, 이때부터는 화랑가로부터 많은 주문을 받기 시작해 더 이상 살롱전에 기대지 않아도 예술가로서 살아갈 수 있었다. 로댕은 유명세를 얻고 나서도 소박한 생활과 성실함을 잃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젊은 시인이었던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로댕의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는다. 시인으로서의 한계에 부딪혀 고향과 가정을 떠나와 파리를 떠돌던 이 청년은 로댕을 만나 그의 비서로 일 년간 일하며 이때 받은 인상을 담아 ‘로댕론’을 집필했다. 이 책을 읽을 때마다 로댕의 작품에 대한 시인의 묘사가 적합하기보다는 좀 과하다고 느껴지면서도 언어의 메마름에 괴로워하는 그가 로댕의 작품을 흡수하며 느꼈을 충족감에는 깊은 공감이 든다. 날것의 재료는 예술가에게 아무런 미래도 보장해주지 않지만 예술에 대한 태도는 예술가들로 하여금 자기도 모르는 사이 작품을 완성하게 한다. ‘로댕론’은 릴케의 행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책이기도 한데, 그는 로댕의 작품을 통해 사물을 통한 깊은 사유 방식을 구축했고, 이는 이후 그의 작품세계에 큰 영향을 미친다. 작품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각은 문학계와 비평계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 국내에도 에세이 풍의 글을 쓰는 문학평론가 고석규가 자신의 저서에서 예술관을 정립하는데 릴케의 영향이 지대했다고 밝히고 있다. 조각은 회화 분야와 맥락을 달리하기 때문에 이후 회화분야에서 일어난 여러 사조와 혁신들을 모두 따라가지는 않는다. 다만 로댕은 미켈란젤로 이후 가장 큰 변화를 일으켰던 조각가로 미술사에 남아있을 뿐만 아니라 문학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작품을 둘러싸고 있는 인상적인 면들과 성스러운 공백들은 언어를 매만지는 이들의 수고와 크게 공명하며 감동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