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드시 정의가 승리한다’는 명제가 만고의 진리라면 좋으련만, 실제 세상에서는 ‘더 지독한 사람이 승리한다’는 말이 더 잘 들어맞는 것 같다. 연일 뉴스에서 들리는 소식들은 권력과 대중 사이의 힘겨루기가 장기전으로 들어가고 있음을 시사한다. 사태를 바라보면 힘은 좀 빠져도 마음을 잘 추슬러서 지치지 않는 시민들의 목소리를 들려주어야 한다.
오늘은 끈기와 성실함으로 일생 작업을 해왔던 척 클로스(Chuck Close)라는 작가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그는 포토 리얼리즘(Photo-realism) 혹은 하이퍼 리얼리즘(Hyper-realism)이라 불리는 경향의 창시자로서, 이 경향은 즉 대상의 모습을 마치 사진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처럼 정밀하게 묘사한 작업들을 의미한다. 작가의 손을 직접적으로 많이 타는 작업들이 대부분이고, 그만큼 수많은 노동과 시간을 요하는 작업이다. 1950~60년대 미국에서는 캔버스 위에 형태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 평면회화야 말로 회화의 본질을 가장 잘 나타낸다는 의견이 두루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 와중에 앤디워홀, 리히텐슈타인과 같은 팝 아티스트, 에드워드 호퍼와 같은 사실주의 화가들이 등장하는데 포토리얼리즘은 이들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새로운 경향이었으며, 척 클로스는 포토 리얼리즘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그는 캔버스의 높이가 7~8m에 이르는 대형 작품을 주로 했는데, 작품이 마치 사진처럼 보이는 이유는 작가가 모델을 두고 초상을 그린 것이 아니라 사진을 그대로 캔버스에 옮기는 것을 목적에 두고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정확도를 기하기 위하여 사진과 대형 캔버스에 격자를 먼저 그려놓고 작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격자는 모눈종이와 같이 촘촘하게 쪼개 놓았고 각 칸에 색을 쌓고 벗겨내기를 작업하며 전체적인 조화를 맞춰 나갔다. 수많은 색들이 나열된 도표를 눈으로 익히고 또 익혔다.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데 대개 4개월에서 7개월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작업의 흐름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작업 기간 동안에는 주말을 따로 두지 않는다고 한다. 다분히 감성보다는 냉철한 이성과 끈기를 더 요하는 작업이었다. 선물처럼 느닷없이 찾아오는 감정과 영감은 예술의 중요한 원천이지만 완성도 높은 작업을 완수하는 힘은 대개 따로 있다. 우리의 목적을 실제로 이루는 힘 역시 깊은 애도와 슬픔, 일시적인 승리에서 오는 만족감만은 아닐 것이다.
척 클로스는 예술가로서 원숙기에 들어서면서 부터 붓이나 에어브러시 대신 손가락을 사용했다. 당연히 이후 작품에서는 작가의 터치감이 생생하게 살아났고, 작품이 더욱 중후해졌으며 깊은 울림을 지니게 되었다. 척추 장애가 생기고 나서부터는 더 이상 붓이나 에어브러시 작업이 어려워지기도 했다.그가 앓고 있던 것은 척추장애 뿐만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심각한 난독증과 학습장애를 앓아왔다. 그러나 유년시절 미술에 두각을 나타내면서 미술을 전공하기 시작했고, 미술가로서 재능을 보이기 시작하면서는 당시 실력 있는 유명 예술가들과 두루 교류할 수 있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당시 캔버스에 형태를 전혀 그리지 않았던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의 영향을 주로 받아 이러한 경향의 작품을 꽤 많이 했었지만 그러한 작업이 자신이 진정 추구하는 바는 아니라고 곧 결론을 내린다.
척 클로스는 주로 인물의 두상을 다룬다. 앤디 워홀이 팝스타나 유명 인사를 모델 삼아 작품을 주로 했다면 척 클로스는 유명 인사들을 거의 그리지 않았으며 주변의 예술가나 가족, 이웃 등 평범한 사람들을 꾸밈없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렸고, 이는 민중과 대중들의 반항적인 목소리를 담고 있다는 평을 받는 부분이다. 척 클로스가 팝 아트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팝 아티스트들이 미디어와 대량생산된 상품들을 가지고 유희를 즐기는 측면이 강했다면 척 클로스는 좀 더 시니컬하고 진중한 자세를 취했다. 당시 미국은 전에 없는 경제적 호황을 누리고 있었지만 시민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하여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계층 간의 격차와 극빈층에 속한 인구는 줄어들지 않았고 세계각지의 전쟁에서 수많은 목숨들이 희생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척 클로스의 작품은 팝아트나 기존의 회화 작품들과는 다른 울림을 지니며 대중들로부터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