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 38년(1762) 세손인 정조(이산)가 사도세자의 장례를 치르고 난 다음날일 7월24일 동궁으로 정해진다. 그러나 정조는 기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죄인의 아들로 불안한 상황이 종료되었다는 안도감과 함께 자신이 없었다면 결코 아버지는 죽지 않았을 것인데 하는 안타까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정조는 빚을 갚기 위해서인지 평생을 아버지의 복권을 위해 노력하였다.
영조는 정조가 죄인으로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의 아들보다 그 형인 효장세자의 양자로서 맥을 이어가기 바랐지만, 정조의 입장에서는 천륜 관계의 생부를 부정하고 자식의 도리를 다하지 않으면서 백성들에게 충효를 바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한, 선왕인 영조의 행위를 부정하고 뒤집는 것은 바로 불충이고, 왕실을 부정하는 것이기에 효장세자를 맥을 이를 수밖에 없었으므로 정조는 선왕인 영조의 뜻도 따르고, 자식으로서 아버지 사도세자도 모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정조는 즉위하던 날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천명하지만, 선왕인 영조의 명령으로 왕실의 종통(宗統)을 위해 효장세자의 맥을 이어받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불순한 무리가 사도세자의 추숭을 하고자 하면 형률로 처리하겠다고 말하고 어느 정도 이를 실행한다. 생모 혜경궁은 후궁으로 중전은 아니지만, 거처를 대비전에 버금갈 만큼 크게 짓고 자경당(慈慶堂)이라 한다. 그리고 조금 지나자 자경당은 자경전으로 불리게 되는데 이는 법도에서 어긋나지만 정조가 혜경궁을 대하는 모습에서 신하들이 알아서 그렇게 불렀다고 본다.
생부 사도세자의 신위도 임금이 되지 못해 종묘에 들어가지 못하지만 이에 못지않은 큰 사당인 경모궁(景慕宮)을 짓는다. 하지만 선왕인 영조가 선정한 묘소의 위치는 어찌하지 할 수 없었는지, 아니면 옮길 만한 명당을 찾지 못해서인지 즉위하고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이장에 대한 생각을 표현하지 못한다.
정조 13년(1789년) 7월11일 금성위(錦城尉) 박명원은 사도세자의 묘인 영우원(永祐園)의 환경이 안 좋아 죽음을 무릅쓰고 상소를 한다고 하는데, 이는 영조의 뜻과 정조가 천명한 사도세자의 추숭을 부추기면 형벌로 다스리겠다는 것에 반하는 상소인 것이다. 상소가 정조의 뜻에 따른 것인지 아니면 충성심에서 나온 것인지는 모르지만 영우원의 이장은 매우 중요한 사항으로 누구도 쉽게 나설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만한 명분과 직분이 필요했는지 고모 화평공주의 남편이며 묘소도감을 지낸 고모부 박명원이 앞장서게 되었다고 본다.
상소의 내용은 영우원의 환경이 안 좋은 4가지를 언급하고 또한 이곳에 뱀이 많이 서식하여 이장이 불가피하다는 상소였다. 이 모든 것이 정조의 계획에 의해 진행되었다고 보는 이유는 사도세자의 묘 이장 상소가 올라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2품 이상의 대신들을 희정당으로 불려 상소를 읽게 하고 의견을 묻는다.
여기에 참가한 대신들은 누구도 반대하지 못하였고 정조는 영우원의 이장을 결정하고 그날 바로 담당관을 임명한다.
나라에서 명당이라고 미리 표시해둔 여러 곳(청주 문의면 양성산, 파주시 장단 백학산, 광릉 근처 달마동 등)을 열거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리고 묘와 원으로 사용할 길지 3곳인 홍제동의 영릉과 건원릉의 오른쪽 원릉 및 수원읍이 있는데 이중 수원 읍은 오래전 효종의 능으로 사용하고자 한 곳이기도 하며 윤강의와 윤선도도 명당이라고 언급한 만큼 의심의 여지가 없고 ‘반룡 농주의 형국’이라 칭찬까지 한다.
반룡농주(盤龍弄珠)란 ‘똬리를 튼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형국’이란 뜻으로 풍수에 능했던 윤선도가 이곳의 형국을 반룡농주라 하고 이는 도선(道詵)국사의 이론을 따른 것이라 하였다. 정조는 이를 이어받아 사용하고 현룡원을 보호하는 사찰을 세우고 용주사라 하고 대웅전에는 많은 용을 조각하여 그 뜻을 높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