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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여행]인간 상록수, 최용신 선생을 만나다

 

 

 

우연히 시작된 상록수와의 인연은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다. 처음 만났던 상록수는 그저 심훈의 소설 ‘상록수’ 속 이름이었을 뿐, 그 정체성이나 스토리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지 않았다. 오늘은 ‘인간 상록수’로 불리는 최용신 선생을 만나러 여행을 떠나보자.

최용신 기념관은 도심 아파트 사이 상록수 공원 내에 자리하고 있다. 작은 공원 내에 위치한 탓인지 일반인들에게는 눈에 띄지 않는 곳이다.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는 최용신 기념관이 들어서기 전으로 그 사이 훌쩍 20여년의 시간이 흘러버렸다. 시간은 많은 것을 변화시킨다. 낡고 쓰러질듯했던 그 공간들은 이제 소박하지만 세련된 기념관으로 재탄생했다.

공원 입구 최용신 기념관 표지판을 시작으로 계단을 오르면 최용신 기념관과 마주하게 된다. 단층짜리 건물이다. 하지만 내부로 들어가면 2개 층으로 이루어져있다. 1층은 상설전시관이, 2층은 사무실과 체험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전시관 내부에는 최용신 선생의 건국훈장을 비롯해 유언장, 상록수 초판본 등 관련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최용신 기념관이 건립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최용신 선생의 제자들때문이다. 제자 중 한 사람이었던 홍석필은 집을 팔아 마련한 돈을 기념관 건립에 기부했다. 그 기부금을 바탕으로 2007년 최용신 기념관은 개관하기에 이른다.

최용신 선생은 어떤 분이셨을까. 어떤 분이셨길래 기나긴 세월이 지난 후에도 제자들이 집까지 팔아가며 선생을 기리고자 했을까. 최용신은 YWCA의 농촌지도사로 파견되어 22살에 샘골로 들어왔다. 농촌마을이었던 샘골에 고등교육을 받은 엘리트여성이 들어온 것이다. 그녀에게는 아주 낯선 곳이었지만 자신을 낮추고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의 주된 일과는 샘골 강습소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녀에게 있어 아이들은 ‘나라의 미래’이자 ‘희망’이었고, ‘보배’였다.

최용신 선생의 열정은 샘골 강습소에 모여드는 학생들로 증명되었다. 작았던 샘골 강습소는 마을 사람들의 기부와 참여로 새로 지어지게 된다. 누군가는 돈을, 누군가는 땅을, 또 누군가는 일손을 기부해 최용신 선생의 열정과 샘골 강습소를 응원했다.

샘골 강습소 학생 수는 두 배로 늘어났다. 오전반과 오후반에 이어 야간반까지 수업이 이어졌다. 하지만 최용신 선생의 열정은 강습소 내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강습소 수업이 끝나면 가정방문을 통해 아이들의 가정환경과 성격, 취미까지 파악하고자 노력했다. 아이들뿐만이 아니라 부녀자들과 노인들도 가르쳤다. 방학이 되면 인근 마을을 돌면서 한글과 성경을 가르치고, 또 잘 살기 위한 방법을 가르쳤다.

더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최용신은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하지만 샘골에서 너무 많은 열정을 쏟아 낸 탓인지 지병인 각기병이 악화돼 6개월 만에 귀국하게 된다. 건강 악화로 귀국했지만 샘골로 돌아온 선생의 열정은 그칠 줄 모르고 이어진다. 선생의 쉼 없는 열정은 결국 과로로 26살 꽃다운 나이에 생을 마감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최용신 선생의 장례식은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강습소가 보이는 일리공동묘지에 묻혔다. 일리공동묘지에 묻혔던 선생은 묘소는 지금은 상록수 공원 내로 옮겨져 있다. 일리공동묘지는 도시개발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지금은 뉴라성호텔 맞은편에 작은 표석만이 그 위치를 대신하고 있다.

상록수 공원으로 옮겨 모신 최용신 선생의 묘소에는 혼자가 아닌 약혼자 김학준과 함께이다. 선생의 유언은 ‘샘골 강습소를 영원히 운영해달라’는 것이었다. 최용신 선생의 열정과 사랑이 담긴 샘골 강습소는 이제 최용신 기념관에서 새롭게 이어지고 있다.

제자들이 기억하는 최용신 선생은 ‘사랑을 주셨던 선생님’이다. 이는 최용신 선생이 주장했던 ‘차별 없는 사랑’과 이어진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긴 세월이 지나 ‘사랑’을 주었던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을까. 최용신 기념관에서 자신의 사랑을 한 번쯤 되돌아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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