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병율
말로 할 수가 없어 말 못할 것이
말 못할 온갖 곳에 가득 찼는데
어떻게 가을이 풀벌레 울음 속에서 잠잠할 수 있는가?
어떻게 풀벌레 울음 속에서 가을밤은 침잠할 수 있는가?
가을은 풀벌레 울음 속에서 잠잠하고
풀벌레 울음 속에서 가문비나무 정강이는 꺾어지는데
생각에 생각을 더하는 밤
우상의 말을 잊고 돌이 된 집들을 잊고 그림자를 잊고
풀벌레 울음 속에서 가을밤은
어떻게 잠잠할 수 있는가
- 문학청춘 / 2016·겨울호
“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시인들도 때로는 당황한다. 그에 대한 이론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헷갈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 앞에서는 키에르케골이 천명했듯 ‘격렬한 고통을 품고 있지만 탄식과 비명이 입술을 빠져나올 때는 아름다운 음악으로 들리는 것’이라는 말에 동의하고자 한다. 시인에게 말 못할 것이 온갖 곳에 가득 찬 상황을 상상해보자. 아무도 그 내면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리라. 그러니 풀벌레 울음 속에서 잠잠한 가을밤이 얼마나 모순된 상황인가. 가을밤을 울어 대는 풀벌레울음 소리는 시인의 심상이 틀림없겠다. 모든 고통스런 비명을 쓸어 덮고 깊어가는 가을밤은 시인의 마음상태를 환기하는 시적 장치이리라. 풀벌레 울음이 드높을수록 밤이 잠잠해지는 이유는 생각에 생각을 더하기 때문일까? 그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이유는 가을이기 때문일까? /이정원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