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8.16 (토)

  • 흐림동두천 29.3℃
  • 흐림강릉 30.6℃
  • 흐림서울 32.3℃
  • 구름많음대전 30.7℃
  • 구름조금대구 32.7℃
  • 구름많음울산 30.7℃
  • 구름조금광주 31.8℃
  • 맑음부산 32.0℃
  • 구름조금고창 32.7℃
  • 구름조금제주 31.6℃
  • 흐림강화 30.0℃
  • 흐림보은 29.2℃
  • 구름많음금산 31.4℃
  • 구름조금강진군 31.5℃
  • 맑음경주시 32.0℃
  • 맑음거제 31.0℃
기상청 제공

[끝나지 않은 정조의 건축]지소(紙所) 下

 

수원행궁의 보수와 문서제작을 위해 만들어진 수원 지소는 정조의 대대적인 지원에 건립되고 기술자들도 당시 최고를 인정받던 승려장인으로 구성하였다. 그리고 특별히 그들이 머물 사찰을 만들어주고 법당에는 취두와 용두 및 잡상까지 올려주어 관료들이 함부로 범접하지 못하게 하였다.

정조 시기에는 뛰어난 종이장인을 구하지 못해 승려장인을 고용했지만 이후 경제 발달로 종이가 대중화가 되고 전국에 종이공장이 세워지면서 기술도 발전하였다. 종교인 승려로서 종이공장운영은 이치에 맞지 않았고, 민간장인의 기술 수준도 높아진 시점에서는 자연스럽게 장인의 교체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화영사례(1894년) 지소편에서는 지장승에 대한 언급은 없고 색리, 고지기, 간지장 책장, 도침장이 각 1명씩 배치되어 있어 지소는 이미 전문관료와 민간장인으로 대치된 것을 알 수 있다.

수원 지소의 설립 당시 지장승을 위해 청련암을 지어주었고 힘을 써야 하는 지장승은 당연 비구(남자 승려)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1777년(정조1)에 비구니 청련이 창건하고 1902년 영친왕 생모인 엄비가 중창하였다.’라고 되어있다. 이를 해석하면 지소에서 지장승들이 떠나게 되자 청련암의 사세가 기울고 세월이 흘러 폐사가 되었을 것이다. 구한말 엄비가 정조와 관련된 이 암자의 중건을 이끌었다고 볼 수 있다.

정조는 수원화성을 조성할 때 사도세자의 후손과 공자의 후손이 살 수 있도록 배려를 하고 땅을 많이 배분해 주었다. 수원 북부의 ‘광무양안’을 보면 누동궁(樓洞宮) 소유의 땅이 많이 보이는데 누동궁은 바로 사도세자의 아들 은언군 후손인 이광(철종 생부)의 사저 이름이다.

고종 또한 사도세자의 직계후손으로 수원에 각별한 애정을 품고 있었다. 이로 인해 청련암 중건을 바로 이들이 나서 후원했을 것이다. 고종이 앞장서서 할 수 없기에 엄비가 나서 중창을 도왔을 것이다. 이때 함께 중창을 추진했던 승려는 비구니(여자 승려)였을 것이며 이때부터 비구니 암자로 맥을 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지금의 청련암 대웅전이 당시 규모나 형태로 돌아갈 필요는 없지만 당시 법당에 사용되었던 취두와 용두 및 잡상을 재현한다면 수원화성의 중요한 무형문화요소가 될 것이다.

지소는 재료를 끓이고 씻는 과정이 많아 땔감이 많은 광교산과 물이 있는 유천이 만나는 곳을 선택하여 건립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지적원도에는 ‘紙所’라고 명확하게 표현된 곳이 있는데 바로 하광교동 424번지로 면적은 570㎡가 된다. 물론 지소의 면적은 이보다 훨씬 컸을 것이다. 닥나무를 깎고 말리고 씻으려면 많은 면적의 땅이 필요하다. 아마도 지적원도를 제작할 당시 종이 제작이 서구화로 인해 지소의 규모가 축소된 결과라고 본다. 당시 토지조사부에서 지소의 흔적은 없지만 하광교리 424번지와 그 주변은 국가 소유의 땅으로 나와 그 일대가 지소의 영역임을 짐작할 수 있다.

지소의 터는 현재 상수도사업소 서쪽에 있는 ‘보훈 게이트볼장’과 언덕길의 일대로 본다.

화성성역의궤에는 기와집으로 21칸이라고 되어 있고 화성반차도와 화성전도(6폭)에는 중정이 있는 ‘ㅁ자’ 건물로 그려져 있다. ㅁ자 평면은 주택에서 사용되고 관아에는 잘 사용하지 않았는데 이를 채택한 것은 당시 귀한 종이를 보관하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본다. 그리고 건물 외벽을 화방벽으로 만들고 외부담장을 설치하지 않은 것은 유사시 침입자를 쉽게 발견하기 위한 계획이라 본다.

마치면서 수원 지소는 종이사업이 쇠퇴해진 시대에 정조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만들어져 관영 종이사업의 발달을 가져오고 종이의 대중화를 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한지의 우수성이 바로 이곳 지소와 청련암에서 시작되었음을 알았다. 한지의 재도약을 이룬 이곳을 널리 알릴 필요성이 있고 수원화성의 무형문화의 요소가 또 하나 첨가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