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의 축성(築城) 추진은 1792년 겨울 정조(正祖)가 31살의 젊은 정약용에게 성제(城制, 성의 규범)의 작성을 지시하면서 시작된다. 정약용은 중국의 윤경(尹耕)이 지은 보약(堡約)과 유성룡이 지은 성설(城設)을 참고해 성제를 만든다. 또 합리적인 공사를 위해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과 기기도설(奇器圖說)을 주어 운반기기 개발도 지시한다. 그러나 축성 사업은 바로 시작되지 않고 정약용에게 기본 설계를 지시한 지 일 년이 지난 1793년 12월이 되어서야 본격화된다.
축성의 공식적인 첫 회의에서 영의정 채제공과 어영대장 조심태는 성곽의 형태를 이전성곽과 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조는 이미 정약용과 같이 성제에 대해 연구가 끝난 상태로 이들에게 새로운 성곽을 주문한다. ‘새로 만들 수원성곽은 여장과 옹성이 있어야 하며, 상대방의 기를 먼저 꺾는 것이 중요하기에 크게 지어야 한다. 즉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위엄을 보일 수 없다’라고 하며 성곽개념을 설정해준다. 위 이야기를 분석해 보면 정조의 최측근인 영의정과 어영대장은 정약용이 이를 준비한 것을 몰랐다는 것이다. 정약용이 수원성에 관여한 기록은 실록 등 국가기록에는 보이지 않고 다산시문집에서 찾을 수 있어 당시 정조의 지시는 공개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조는 정약용의 계획안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우리 현실에 맞게 계획안을 발전시킨다. 그 준비과정에서 전국팔도의 성지(城池), 남쪽에 남아있는 왜성(倭城)까지 조사 정리하고 결과물로 성제고(城制考), 성제도설(城制圖說)을 편찬까지 하게 된다.
수원성의 독특한 형태는 정약용의 성제와 공식적으로 전국 성지의 조사와 분석이 더해져 우리의 형편에 맞게 만들어졌다. 중국성제는 기본적으로 2중성(2겹)과 해자(垓子)를 기본으로 하였는데 수원성은 이를 채택하지 않았다. 화성성역의궤에서는 그 이유를 ‘중국성과 달리 수원성은 앞뒤로 팔달산과 안산인 일자산(一字山)이 있어 없어도 무방하여 제외한다.’고 밝히고 있다. 중국성제를 참고하여 공심돈(空心墩), 포루(砲樓), 적대(敵臺), 노대(弩臺), 각대(角臺, 角樓), 오성지(五星池), 현안(懸眼) 등이 새롭게 또는 발전된 형태로 등장한다. 또 일본성제를 참고하여 치(雉)의 단면선을 하부를 넓게 하고 윗부분은 세우게 된다.
일반적으로 임금은 업무의 세부적인 것까지 관여하지는 않았는데 정조는 아주 깊숙이 관여한다. 정조의 설계개입은 성제를 넘어 배치 모양까지 관여하여 설계변경을 한다. 1794년 1월 수원에 원행을 와서 성곽 자리를 따라 세운 기발을 보고 북쪽을 더 밀고 남북을 길게 만든다. 설계변경 이유에 대해 정조는 ‘화산(花山, 사도세자 묘가 있는 산 이름)이 의미는 주변 800개의 산봉우리가 빙 둘러 있어 마치 꽃잎이 꽃 가운데로 향하여 모인 것처럼 보여 붙은 이름이다. 그래서 유천성(柳川城, 수원성의 다른 이름)도 이름처럼 버들잎 모양과 천(川)자 모양을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북쪽 성곽을 밀어 나뭇잎 모양으로 만들고 유천(수원천)의 서쪽에 천(川)자 모양으로 만들었다. 지금의 화성안내도는 이를 고려하지 않은 형태로 되어있지만, 의궤의 화성전도(華城全圖)나 병풍의 그림에는 나뭇잎과 천(川)자 모습이 뚜렷하게 표현하고 있다.
수원성곽 시설물의 건축적 특징을 1795년 윤2월 을묘원행을 기점으로 이전과 이후 공사로 구분할 수 있다. 구분 요소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뚜렷한 것은 벽돌의 사용에서 보인다. 당시 실학자의 주장은 성곽 재료 중 돌은 불에 약해 쉽게 터지기에 벽돌 사용을 주장하고 있었다. 후반부의 건축은 전반부보다 모든 부분에 수준이 높았다, 벽돌의 제작 및 시공기술의 경험이 축적되었고 을묘원행 같은 큰 행사도 없어 시간적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정조가 1797년 1월 원행시기에 신하들에게 공심돈을 가리키며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라고 자랑하던 순간이 생각난다. 이처럼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곡선 형태의 건물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