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예술가들의 궁극적인 목적이란 결국 예술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찍는 일일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작품이 예술의 역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명작으로 남길 바랄 것이다. 클로드 로랭(Claude Lorrain, 1600~1682)의 작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잔잔하고 아득한 풍경 위로 한 시기의 위대한 역사가 막을 내리는 듯한 영감을 받는다. 1662년경에 제작된 <아폴론에게 제물을 바치는 풍경>에서는 황금빛 햇살과 수증기를 가득 품은 대기가 너른 초원 위에 드리워져 있다. 고대의 신전은 햇살을 받아 노랗게 반짝거리고 있고 주변의 나무들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신전 앞에 서있는 사람들은 분주해 보이지만 크기가 너무나 작아 이 거대한 풍경을 잠시 스쳐 지나가는 존재로만 여겨진다. 나무는 신전보다 더 크고 웅장하며 자신의 아래로 묵직한 그림자를 내리고 있다.
클로드 로랭은 프랑스 출신의 화가로, 이탈리아의 풍경에 매료된 이후로는 평생 이탈리아를 배회하며 살았다고 한다. 고대 로마의 위대한 건축물들 그리고 지역별로 시시각각 변하는 다양한 기후와 자연 풍경은 그를 무한한 영감으로 이끌었다. 오늘날의 우리가 클로드 로랭의 작품을 바라보면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는 수많은 풍경화 중의 하나라고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그건 클로드 로랭이 예술사에서 미친 어마어마한 영향 덕분에 많은 후대 화가들이 그를 추종했기 때문이고, 그 결과 우리에게 클로드 로랭 풍의 풍경화가 너무나 친숙해진 탓이다.
하지만 클로드 로랭은 그야말로 그 이전에는 없었던 작품을 완성했던 화가였다. 그의 이전에는 인물이나 사물이 아닌 풍경 그 자체를 대상으로 그림을 그리는 일이 거의 없었을 뿐만 아니라, 풍경에 사유와 철학을 담을 수 있다는 생각을 사람들이 미처 하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클로드 로랭은 영국에서 큰 돌풍을 일으켰고, 이후 문학과 시각예술이 또 다른 풍경화의 거장 푸생과 로랭의 영향 하에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며, 귀족들은 클로드의 풍경화를 따라 자신의 정원을 가꾸기 시작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영국식 정원’은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뿐만 아니라 위대한 영국의 화가 윌리엄 터너 역시 자신에게 가장 큰 영감을 주었던 선배 화가로서 늘 클로드 로랭을 지목했다. 좀 더 시간이 흘러 클로드 로랭은 고향인 프랑스에서도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후배 화가들이 자연광선과 대기, 물결을 연구하는데 바로 클로드 로랭의 작품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며, 이로써 인상주의가 탄생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아폴론에게 제물을 바치는 풍경>을 살펴보자. 평소에는 인적이 거의 없을 것만 같은 한적한 초원에 웬일로 커다란 신전이 우두커니 서있게 되었는지 궁금해진다. 그리고 신전의 건너편에 서있는 나무는 신전을 충분히 앞도하고도 남을 만큼 어찌 그리도 거대할 수 있는지 의아해진다. 초원 어디를 둘러봐도 그와 같이 큰 나무는 볼 수가 없다. 이는 클로드 로랭이 풍경을 있는 그대로 그리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구성이다. 그는 유구한 역사가 담긴 고대 건축물과 위대한 자연물을 적절히 조합하고 배치해 새로운 풍경을 창조했다. 그것은 한 축에는 위대한 역사가 다른 한 축에는 위대한 자연이 우뚝 서 있는 풍경과도 같으며 무수한 세월이 응집되어 있는 풍경이기도 했다.
반면 로랭의 풍경화에서 등장인물들은 작은 형태로 그려지게 마련이다. 그것은 <하갈과 천사가 있는 풍경>, <나르키소스와 에코가 있는 풍경>과 같이 극중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이 무구한 역사 속에서 아주 작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만 같다.
하지만 클로드 작품 안에서라면,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통제 불가능 한 역사와 자연 앞에 마냥 불안에 떨고 있는 존재가 아니어도 좋다. 커다란 막이 내리고 나면 또 다른 막이 열리도록 클로드 로랭의 작품은 무한한 시간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그전까지 종교개혁, 정치적인 변혁, 전쟁, 신대륙의 발견 등 예상치 못했던 미스터리들의 출현으로 잔뜩 주눅 들어 있던 인간은 조금 어깨를 펴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이 거쳐 되돌아보면 그 모든 것들이 결국 이와 같은 풍경을 이루기를 간절히 바래보며 2017년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