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난파(본명 洪永厚) 생가 ‘꽃동산’ 조성을 둘러 싸고 찬성과 반대 논란이 일고 있다. 남양에서 태어난 홍난파가 우리나라 음악계에 큰 발자취를 남긴 양악(洋樂)의 큰 별이 라는데는 누구도 이론을 달지 않는다.
1913년 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樂傳習所) 성악과(2회)와 1914년 기악과(3회)를 잇따라 졸업하고, 1918년 도쿄우에노음악학교에서 본격적인 음악수업을 한 것이나, 1919년 귀국해 조양구락부(調陽俱樂部)를 창설하여 후진 양성에 힘쓴 일, 음악전문지 ‘음악계’를 창간해 음악 이론을 정립하는데 그치지 않고 화려한 음악활동을 펼친 일 등은 감히 추종을 불허하는 독보적 행적이라 할 수 있다.
홍난파의 음악활동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1936년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경성방송관현악단을 창단했고 음악회, 연주회, 지휘, 작곡, 논설에 이르기까지 눈부신 활동을 함으로써 홍난파는 그 자체로서 조선 음악계를 대표하는 거목이면서 자존심이었다. 일세를 풍미한 그도 운명은 거스를 수 없었던지 1941년 8월 22일 영면하니, 그의 나이 44세였다.
문제는 사후에 밝혀진 친일행적이다. 화성시가 홍난파를 기리기 위한 ‘꽃동산’ 조성계획을 발표하자 오산·화성환경운동연합은 즉각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홍난파의 친일행적 논란이 매듭 지워지지 않은 상황에서 수십억원을 들여 사업을 추진 해야하는지 의문이다.” 라는 것이다.
그동안 홍난파의 친일행적은 여러 형태로 지적되어 왔다.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 모임’도 그 중 하나로, 지난 2002년 친일민족 행위자 708명을 공표하면서 홍난파가 조선음악가협회 상무 이사를 역임하고, 친일가요 ‘정의의 개가’를 작곡한 전력(前歷)을 문제 삼은 적이 있다. 아마도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것이 지배적이다.
친일행적은 민족 감정으로 볼 때 용납하기 어렵다. 그러나 홍난파가 남긴 음악적 업적 전체를 일시적 친일을 문제삼아 매도하거나 무시하는 것도 문제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홍난파도 식민지시대에 살다보니 친일의 실수를 범했을지 모른다. 홍난파는 저승의 객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래서 용서을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 없다. 용서를 하고 안하고는 살아있는 자의 몫이다. 애증(愛憎)은 종이 한 장 차이다. 홍난파를 사랑의 눈으로 볼 수는 없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