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재전서에는 당시 건물의 편액을 일일이 다 열거하여 그 뜻을 기록하고 있다. ‘낙남헌(洛南軒)은 한(漢) 나라 고조(高祖)가 낙양(洛陽)의 남궁(南宮)에서 주연을 베풀었던 뜻을 취한 것이고, 우화관(于華觀)은 화(華)의 땅 봉인(封人)이 축원한 뜻을 취한 것…’ 등이 나와 있다. 그리고 방화수류정(訪華隨柳亭)의 의미는 ‘꽃이 핀 산과 버들이 늘어진 냇가의 뜻을 취한 것이다’라고 정확히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방화수류정을 현시점에서는 이와 다른 가설이 두 개가 더 있다. 첫 번째는 중국 송나라 정명도(程明道)의 시 ‘춘일우성(春日偶成)’에서 나오는 시구를 차용한다. 詩의 내용은 ‘운담풍경근오천(雲淡風輕近午天) 방화수류과전천(訪花隨柳過前川) 방인불식여심락(傍人不識余心樂) 장위투한학소년(將謂偸閑學少年)’이다. 해석하면 ‘구름은 맑고 바람은 가벼운 한낮에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시냇물을 건너간다. 사람들은 나의 즐거운 마음을 모르고, 한가함을 탐내 소년처럼 논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유천(柳川·수원천)을 따라가면 화산(華山·사도세자의 묘가 있는 곳)에 이른다’라는 설로 효자의 의미가 있다는 가설이다.
홍재전서에서 분명히 방화수류정에 대해 뜻을 나타내고 있는데 다른 가설이 나오고 있다. 이는 다른 편액과 달리 진정한 뜻을 나타내지 않고 다른 뜻이 숨어있기에 이런 문제가 나온다고 본다. 그 속뜻은 바로 이곳의 이름이 용두(龍頭·용의 머리)라 하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정조는 평소에 용(龍)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사도세자 묏자리를 반룡농주(盤龍弄珠·용이 구슬을 희롱하는 형국)의 형상을 한 수원을 선정하였다.
정조가 용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왕을 상징하는 동물이기도 하지만, 아버지가 꾼 태몽에 용이 등장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용은 사도세자와 정조, 부자(父子)간의 연결고리라 할 수 있다.
정조는 수원에 축성을 결심한 후 이곳에 용연과 용두가 있다는 이야기 듣고 놀라게 된다. 현륭원이 바로 용의 자리인데 여기에도 그 용이 있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이곳을 용두라 하는 이유는 수원화성의 동성(東城)이 입면상으로는 일자문성(一字文星·한 일 자 모양으로 길게 생긴 언덕)이지만 평면상은 용이 하늘을 나는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 용연과 용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바로 하늘이 점지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용은 아버지와 자신을 연결하는 중요한 매개체인데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다. 이를 기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였다.
그 결과 용을 용답게 하는 것이 하늘의 뜻을 받드는 일이라 생각하고 멋진 뿔을 만들어 선물하기로 한다. 뿔 형태 건물을 찾아보니 십자각(十字閣, 각루)이 가장 유사한 것을 알고 이를 여기에 설치하게 된다.
정약용의 기본설계 포루도설부분에는 적루(敵樓)·적대(敵臺)·포루(鋪樓)·노대(弩臺)만 나오지 각루라는 용어는 나오지 않는다.
각루는 네모의 궁궐 모퉁이에 위치하여 X·Y 양방향을 정면으로 두어 십자각의 형태를 띠고 있다. 수원화성은 네모가 아닌 원형의 성곽으로 각루의 설치는 합리적이지 않고 또 정식명칭으로 사용하기에도 부적당하다. 만약 수원에 각루를 설치한다면 성곽이 아닌 수원행궁에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수원화성에는 4개의 각루가 있지만 동북각루만 십자각으로 만들고 나머지는 이와 관계없는 형태로 만든다. 이는 합리적인 정조의 입장에서 볼 때 불필요한 십자각을 다 만들지 않고 균형을 맞추기 위해 이름만 부여하는 선에서 조정했다고 본다.
용두의 뿔인 십자각에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라는 별칭을 부여하지만, 그 속내는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아마도 정조는 하늘이 점지해 준 이곳의 비밀을 아무도 모르게 하고 싶은 마음 때문으로 보인다.
방화수류정의 속뜻은 바로 ‘멋진 뿔을 가진 용이 이곳 화성에서 유천을 따라 연결된 화산(아버지 묘가 있는 산)까지 영원히 보호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며 ‘용이 아버지와 본인의 연결고리’란 의미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