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의 4대문 앞에는 모두 옹성이 설치되어 있다. 4개의 옹성은 남북이 비슷하고 동서가 비슷하다고 화성성역의궤에 기록되어 있으나 각기 건축과정이 달라 세부적으로는 차이점이 많이 발견된다.
북옹성은 1차 공사의 막바지인 1794년 10월 20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겨울을 지나 다음 해 을묘년(1795) 2월 27일 완성되어 4개월이나 소요된다. 반면에 을묘년 행차가 끝나고 시작된 남옹성은 1개월, 옹성문이 없는 동서옹성은 8일 만에 공사가 완성된다. 뿐만 아니라 벽돌 공사는 물을 사용하여야 하는데 한겨울을 물이 얼어 제대로 공사가 진행되지 않았고 치명적 하자가 있는 옹성으로 만들어진다.
이렇게 원설계자인 정약용이 배제된 상태에서 급하게 만들어진 북옹성은 여러 문제를 지니게 된다.
첫째, 홍예석 사용문제다. 화공(火攻)에 강한 벽돌 옹성을 만들고도 가장 취약한 문의 홍예 재료를 돌로 만든다.
둘째, 적루를 설치하지 않은 문제다. 정약용의 설계에는 대문의 좌우에 적대를 설치하고 그 위에 적루를 계획하고 옹성 위에는 설치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공사실무자들은 다산의 계획과 반대로 적대의 적루 2개를 생략하는 대신 옹성 위에 적루를 계획한다. 하지만 화성 공사가 끝날 때까지 설치되지 않았다.
공사감독관인 조심태 등이 옹성 위에 적루를 세우고자 한 기록은 화성성역의궤에 ‘옹성문 위의 적루를 세우지 않은 것은 정성(正城, 본성)이 가로로 세워져 적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언급한 기록이 있다. 또 화성능행도 중 서장대야조도에서는 당시 만들어진 않은 남옹성 위에 적루가 보인다. 여러 가지를 종합할 때 적대 위 적루를 대신하여 옹성 위에 하나의 적루만 만들고자 했으나 이마저 생략한 채 화성이 준공되고 만다.
셋째, 오성지는 나무로 만들어진 대문을 보호하고 위에 물통을 두고 유사시 물을 흘려내려 불을 끄는 장치인데 물구멍이 홍예문 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외부로 향해 있어 쓸모가 없게 만들었다. 이처럼 필요 없다고 생략한 적루를 아들 순조가 추가로 설치한 것은 옹성의 결점을 인정하고 보완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단면이다.
옹성이 만들어진지 약 157년이 지난 후 한국전쟁때 장안문 홍예에 숨어있는 중공군을 미군 비행기가 공격하면서 장안문은 반파(半破)된다. 하지만 장안문과 달리 북옹성의 피해는 당시 사진으로 볼 때 크지 않았고 적루도 온전히 남아있었다. 그러나 전쟁 이후 사진에서는 옹성만 보이고 적루는 보이지 않는다. 당시 사회경제적 여건이 좋지 않아 여기까지 관리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 소실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20여 년을 방치된 채 지내오다가 박정희 대통령이 국방유적 정비를 지원한다. 국방유적인 수원화성이 여기에 힘입어 장안문과 북옹성 및 적루도 1796년 복원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복옹성의 복원은 창건할 때와 마찬가지로 절대권력자의 명령으로 급하게 진행된다. 또한 동시에 많은 시설들이 복원되면서 연구와 검증이 제대로 이루어질 시간이 없었다. 당시 복원 관계자의 이야기로는 적루를 복원의 대상으로 할지 말지도 고심하였다고 한다. 화성성역의궤에는 분명 적루를 만들지 않았다고 되어있고 또 언제 만들어졌는지 모르는데 의궤 내용과 달리 복원하는 것이 타당한 것인지에 논란이었다. 논의 결론은 의궤의 내용보다는 현황과 근대 사진 자료를 기준으로 복원하였다고 하니 옳은 결정이라 생각한다.
짧은 시간에 복원을 잘 하였지만, 잘못한 부분도 있다. 북옹성의 내부 평여장 높이가 의궤에서는 3.5척(1.078m)인데 복원은 5척(1.54m)으로 하여 내부 마당이 안 보이게 하는 실수를 하였다. 옹성 안으로 적이 들어보면 공격을 해야 하는데 마당이 전혀 보이지도 않게 하였다.
의문이 있는 부분으로는 옹성문 천장의 용(龍) 그림이다. 의궤에는 장안문 문의 천장에만 구름 그림이 있고 옹성에는 그림의 재료나 화공이 투입되지 않아 창건 당시에는 그림이 없었다. 언제 무슨 이유로 그려졌는지는 더 연구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