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무늬
/이선유
누가 다녀갔을까
연둣빛 나뭇잎에 새겨진 상형문자
쓰다 지운 흔적의 필체가 둥글다
은밀한 식탐에
숲은 얼마나 진저리를 쳤을까
잎맥이 끊어진 자리마다
어느 미물의 한 끼 식사가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오월의 빗방울이 찢어진 페이지를 읽고 또 읽는다
구멍으로 모음 하나가 또르르 구른다
이가 빠진 잎사귀들의 안간힘,
상처가 힘이다
잎사귀를 닮은 노모의 낡은 팬티
빨랫줄 집게가 늘어진 허리를 물고 있다
햇빛에 드러난 구멍들
본래의 문양인 듯 태연하다
내 옆구리 어디쯤 접혀있는 얼룩들
그때 온몸으로 진물을 흘렸다
가만히 꺼내보면
상처 위에 밀어 올린 꽃이 더 향기로웠다
상처도 아물면 초록의 무늬가 되었다
연둣빛 새싹이 넓어지면서 초록 잎사귀로 자라간다. 그 잎사귀에는 ‘쓰다 지운 흔적의 필체가 둥글’게 남아 있다. ‘은밀한 식탐’을 가진 ‘어느 미물의 한 끼 식사가 그대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연두와 초록은 신선하고 좋은 것이지만 그런 연두와 초록에도 찢어지고 구멍이 난 상처가 있다. 그런 상처는 ‘노모의 낡은 팬티’를 닮았다. ‘내 옆구리 어디쯤 접혀있는 얼룩’, ‘온몸으로 진물을 흘’리는 상처였던 것이다. 상처가 만들어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 시는 말한다. ‘상처가 힘’이라고. ‘상처 위에 밀어 올린 꽃이 더 향기’롭다고. ‘상처도 아물면 초록의 무늬가 되’는 법이라고. 초록과 상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일 터, 지금은 상처가 초록을 증명하는 날이다. /이종섶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