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코니에 앉아 있는 여인의 인상은 당차고 자신만만하며 아름답다. 1874년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가 그린 <특별관람석>에는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여인이 등장한다. 여인의 얼굴과 가슴은 도자기처럼 새 하얗고 흰색과 까만색의 강렬한 스트라이프 드레스 무늬는 그녀의 피부를 더욱 빛나게 한다. 여인의 뒤로는 르누아르의 형이자 저널리스트였던 에드몽이 오페라 글래스를 들고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그가 입고 있는 하얀 셔츠와 검정색 수트가 여인의 드레스 무늬와 한데 뒤섞여 버린데다가 여인에게서 나는 광채가 워낙 강렬하다보니, 에드몽은 단지 배경으로밖에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다.
이 여인은 몽마르트 출신의 모델 ‘니니’로서, 이 작품을 계기로 창부라는 뜻의 ‘가오리입’이라는 별명을 지니게 된다. 이 그림은 1874년 파리에서 열린 첫 번째 인상주의 전시회에 선보였었는데, 인상주의에 대한 평론가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을 때니 이 작품 역시 적잖은 비난을 감수해야 했을 테고 모델을 서준 여인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보다 십년 전 쯤에 마네가 <올랭피아>라는 제목의 누드를 발표했을 때에도 사람들은 모델을 가리켜 창녀라고 비난했다. 두 화가 모두 여인들을 고리타분한 성녀나 귀부인으로 그리는 대신 우리 주변에 실제로 있음직한 사실적인 모습으로 그리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마네가 그린 여인들은 조금은 복잡한 심연을 얼핏 비추고 있는데 반해, 르누아르가 그린 여인들은 대체로 단순하면서도 우아한 인상들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한 차이는 여인들을 바라보는 화가의 시선에서, 혹은 모델에 대한 취향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적어도 작품을 놓고 보면 르누아르는 마네보다는 여인들을 어느 정도는 동경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이 있다. 천재 화가 르누아르가 유년시절 성악에 뛰어난 소질을 보여서 선생님이 그의 부모를 찾아와 음악을 가르치라고 강권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않았으므로 그의 부모는 그가 도자기 공장에 취업해 도자기에 그림 그리는 일을 하도록 시켰다. 다행이도 그 일은 적성에도 잘 맞았고 그곳에서 그는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다. 그는 어린 시절의 이 경험을 통해 사람들이 어떠한 그림에 행복을 느끼는지를 몸소 익혔을 것이다.
그러나 도자기 산업이 기계화되면서 그는 실직하고 말았고, 고단한 시절이 그를 찾아왔다. 그는 이때부터 단순한 기능인으로서의 삶에 한계를 느꼈고 좀 더 그림에 매진해 위대한 화가가 되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주경야독 생활을 했고, 저녁에 화실을 다니며 그림을 배웠다. 그 무렵 바지유, 시슬리, 모네와 같은 화가들을 만나 교류하게 되었고 이들과 함께 인상주의에 대한 비전을 키워나가게 된다. 1874년 작 <특별관람석>에서 그가 드레스의 무늬와 발코니석의 커튼, 난간 등을 처리한 솜씨를 보면 그가 이미 한 단계 성숙을 이룬 대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림 외에 다른 곳에 한 눈 팔 줄 몰랐던 그는 소설가 에밀 졸라가 종종 작업실로 동료들을 찾아와 논쟁을 펼칠 때에도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그림 그리는 일에만 열중을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인상주의의 비전과 실험에는 전폭적인 동의를 했지만 그는 그가 지닌 예술적 목표는 손을 놀려 그림을 그리는 것 말고는 절대 이룰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수한 경험이 쌓여 한 사람의 거장을 완성하는 거라면, 그 분야의 첫 경험은 거장에게 깊이 각인되어 평생에 영향을 줄 것이다. 르누아르는 도자기 공장에서 실직 한 후 오랜 연습과 실험을 거쳤지만, 그가 처음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면서 쌓았던 취향은 이후 회화 작품 속에서도 반복적으로 펼쳐지게 되었다. 물론 그는, 여인의 살결 위에 빛과 그림자를 얼룩덜룩하게 찍어냈을 정도로, 인상주의 실험을 가장 대범하게 강행했던 화가 중 하나였지만, 결국 그의 작품에는 어딘가 모르게 환상적이면서도 행복한 기운이 감돌게 되었고, 이로 인해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보다 그는 좀 더 빨리 콜렉터들의 마음에 들게 되었다. 하지만 화가들의 인생을 좀 더 깊이 이해하는 이들이라면, 작품 위에 돌고 있는 그 행복한 기운마저도 오랜 시간 붓을 들고 손놀림에 집중해왔던 화가의 오랜 노고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