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여름, 경주학술회의에 참가했다가 오후에 관광에 나섰다. 시내를 벗어나 감은사지와 대왕암을 둘러보는 일정이었다. 감은사지에서 천년의 세월을 당당하게 서 있는 삼층석탑 앞에 섰다가 대왕암으로 향했다. ‘주역’ 건괘에 나오는, ‘비룡재천(飛龍在天) 이견대인(利見大人)’에서 이름이 유래한 이견대에 올라 대왕암을 찾았다. 태풍의 영향으로 거센 파도가 연신 대왕암을 덮쳤으나 이름답게 대왕암은 의연했다. 그 감동의 여운이 가시기 전에 ‘삼국사기’를 펼쳤다. 682년 여름, 신문왕이 바다에 떠다니는 산을 바라보다가 아버지 문무왕과 외삼촌 김유신 장군이 보낸 용을 만났다는 이야기에 눈길이 머문다.
감은사지는 문무왕과 신문왕 부자의 합작품이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표지에 사용되어 더욱 친숙해진 삼층석탑이 서 있는 감은사는 삼국을 통일한 후 문무왕이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불심으로 건립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공사를 마치기 전에 문무왕이 서거하자 아들 신문왕이 불사를 완성했다. 신문왕은 동해 용왕이 된 아버지 문무왕이 편히 휴식할 수 있는 공간을 금당 아래에 마련해 두었다. 감은(感恩)이라는 가람의 이름에도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존경과 사랑이 들어있다. 실제로 감은사 앞을 흐르는 대종천 물길은 대왕암이 있는 동해로 이어진다. ‘삼국유사’는 문무왕의 유언을 기록하고 있다. 왕은 운명하기 전 지의법사에게 말한다. “짐은 죽은 뒤에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겠소. 그래서 불법을 높이 받들고 나라를 지키겠소.”
우리 역사상 유일한 수중릉인 대왕암의 주인공 문무왕(文武王·재위 661~681)의 이름은 법민, 진골로서 최초로 왕위에 오른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언니의 꿈을 사 왕비의 자리를 차지한 김문희의 맏아들이다. 외삼촌은 아버지 김춘추와 함께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여 흥무대왕이란 시호를 받은 김유신 장군이다.
문무왕은 자신에게 맡겨진 시대의 책무를 분명히 인식했다. 전쟁으로 지쳐있는 백성들의 염원을 정확히 꿰뚫었다. 아버지가 불러들인 당나라 군대를 몰아내는 일도 자신의 몫이란 사실도. 속히 전쟁을 끝내고 백성들이 생업에 힘쓰도록 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왕위에 오르기 전 10년을 당나라에서 지냈으며, 귀국한 후에는 전쟁터를 누볐던 문무왕은 끝내 아버지 무열왕이 벌려 놓은 대업을 완수했다.
681년 7월 1일, 문무왕이 승하했다. 신하들은 왕의 유언에 따라 화장한 유골을 동해 바다 속 큰 돌에 모셨다. 세상에서는 그 돌을 가리켜 ‘대왕암’이라고 부른다. 문무왕이 남긴 말은 여전히 울림이 크다.
“과인은 어지러운 전쟁 시대를 만나 서쪽을 정벌하고 북쪽을 토벌하여 강토를 평정했다. …신라 사람은 물론이요 고구려와 백제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벼슬을 내려주었다. 무기를 녹여서 농기구를 만들었고, 백성들을 오래 살게 하려고 힘썼다. 세금을 가볍게 하고 부역을 줄이니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해 백성들은 편안해지고 나라 안에는 근심거리가 없게 되었다. 창고에는 곡식이 산처럼 쌓이고 감옥에는 죄수가 없어 풀만 무성하니, 산 사람과 죽은 사람에게 부끄러울 게 없고,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할 만하다.”
문무왕은 자신의 무덤을 호화롭게 만들어 봐야 재물만 허비하고 사람들만 힘들게 할 뿐이라며 화장할 것을 지시한다. 그리고 이렇게 당부한다.
“변방의 성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일과 주군에 세금을 부과하는 일은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모두 없애고, 율령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즉시 개혁하라.”
문무왕은 백성들에게 국방과 납세의 부담을 최대한 가볍게 하도록 지시하고, 행정력은 백성들이 편안하게 생업에 힘쓰도록 지원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었다.
남북화해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다. 남북의 지도자들이 자신에게 맡겨진 시대의 책무에 문무왕처럼 헌신한다면 올가을엔 ‘평화’라는 달콤한 열매를 맛볼 수 있지 않을까.